미국 정부와 의회 활동 등을 전문으로 다루는 미국 방송사가 6.25 한국전쟁 70주년을 앞두고 참전용사들의 구술 증언을 방송할 예정입니다. 가장 치열했던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앨런 클라크 씨와 흑인 해병대원이었던 제임스 샤프 씨의 사연이 소개됩니다. 조은정 기자가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한국전쟁뿐 아니라 미 해병대 전투에서 가장 치열했던 장진호 전투를 치룬 참전용사 앨런 클라크 씨의 이야기가 6월 21일 미국 `C-SPAN’을 통해 방송됩니다.
이번 방송은 미국의 비영리재단인 한국전쟁유업재단의 참전용사 구술사 기록 (Korean War Legacy Project) 영상을 받아 이뤄지는 것입니다.
한국전쟁유업재단은 한국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1천명 이상의 참전용사들을 인터뷰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VOA가 한국전쟁유업재단을 통해 미리 확보한 자료에서 앨런 클라크 씨는 한국전쟁 중 인천상륙작전부터 시작해 5개의 전투를 치렀지만 장진호 퇴각이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겨울 미 해병대 1사단 등 유엔군이 숫적으로 8배나 되는 중공군의 포위와 엄청난 강추위를 뚫고 퇴각하며 2주간 치른 전투입니다.
해병대 1사단 소속이었던 클라크 씨는 중공군의 전면적인 공격으로 퇴각 명령을 받고 고토리에 도착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눈보라까지 몰아쳐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클라크 씨] “The third day, the wind began to dissipate and the clouds began to pair a little bit and at night he went out of his tent and looked out and saw it was a flurry and he saw one star.”
사흘째 되던 밤 고토리 지역을 담당한 1연대장 채스터 풀러 대령이 하늘에서 빛나는 별을 봤고, 다음날 아침 다시 움직인다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별을 신호탄으로 중공의 포위망을 뚫고 철수에 성공한 것입니다.
클라크 씨는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전우들과 함께 가슴에 ‘고토리의 별’을 항상 달고 있습니다.
제1해병사단은 계속 남하해 흥남에 도착했고, 제10군단 소속 다른 부대들과 함께 배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했습니다. 피난민 10만여 명을 구출한 흥남철수 작전이었습니다.
[클라크 씨] “Our chaplain was, I think instrumental in talking to some of the commanders of the ships..”
클라크 씨는 당시 군목이 선박 지휘관들을 설득한 것이 피난민 구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기억했습니다.
한편, 1951년 해병대 1사단 소속으로 한국에 파병된 제임스 샤프 씨는 입대 당시 장진호 전투가 미국에 널리 알려져 많은 젊은이들이 한국전에 참전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기관총 사수였던 샤프 씨는 한국에 파병된 몇 안 되는 흑인 해병으로, 전우들이 중공군과 백병전을 벌일 정도로 최전선에 있었다고 기억했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눈부시게 발전한 한국을 방문한 것이 전쟁의 상처를 모두 치유하고도 남았다고 말했습니다.
[샤프 씨] “See Busan, see Inchon, see Seoul, it was truly a life-lifting experience. Most of the bad memories if not all had been replaced in me now with the goodness.”
부산, 인천, 서울의 새로운 모습을 본 뒤 마음 속의 나쁜 기억이 모두 좋은 것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샤프 씨는 참전용사는 참전이 과연 가치있는 결정이었는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고민하기 마련인데, 재건된 나라를 볼 수 있는 드믄 기회를 갖게 돼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샤프 씨의 구술사 인터뷰는 오는 20일 `C-SPAN’을 통해 방송됩니다.
VOA 뉴스, 조은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