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최고 대학으로 꼽히는 김일성종합대학이 10월1일 설립 74주년을 맞았습니다. 전문가들과 이 대학 출신 탈북민들은 북한 당국이 인터넷을 허용하고 외국 대학과의 학술 교류를 대폭 확대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지난 2016년,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 3명 등 국제 석학들이 평양의 김일성종합대를 방문한 뒤 ‘BBC’ 방송에 개탄을 쏟아냈습니다.
학교 측의 설명과 달리 학생들은 현대인의 필수품인 인터넷에 접속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993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영국의 리처드 로버츠 박사는 “요즘 세상에 과학자가 인터넷이 없다면 죽은 것”이라며, 인터넷 단절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앞서 김일성종합대를 방문했던 세계 최대 인터넷 검색 업체인 ‘구글’의 에릭 슈미트 회장도 북한의 인터넷 상황은 세계 최악 중 하나라며, 대학생들이 자유롭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는 등 암흑 속에 갇혀있다고 말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들과 전문가들이 이렇게 큰 실망감을 표시한 것은 북한의 교육을 대표하는 김일성종합대학의 상징성 때문입니다.
한국 통일부 산하 통일교육원에 따르면 김일성종합대 졸업생들은 북한 정·관계에 대거 진출해 활동 중이며, 내각 부장급 이상의 절반, 부부장급 이상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북한을 대표하는 대학의 위상’을 갖고 있습니다.
2011년부터 ‘캐나다-북한 지식교류 협력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UBC) 박경애 교수는 29일 VOA에, 북한이 김정은 정권 출범 이후 김일성종합대에 대한 지원과 투자를 크게 확대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박경애 교수] “김일성종합대학을 전 세계 다른 나라 대학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세계적인 대학으로 만들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저도 평양에서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북한은 김일성종합대에서 국제학술회의를 거의 매년 개최했고, 지난해에는 자연박물관과 첨단기술개발원 준공식을 여는 등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통한 경제발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박 교수는 북한이 김일성종합대 교수 등 6명을 매년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에 보내 6개월간 연수하도록 허용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종합대는 ‘QS’ 등 세계 주요 대학 평가기관들이 매년 발표하는 순위에서 평가기준에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크게 뒤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으로 북한에서 교수를 지낸 뒤 한국 이화여대에서 다시 박사학위를 받은 현인애 이대 초빙교수는 29일 VOA에, 김일성종합대학에 대한 북한의 다양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세계와 격차가 많이 나는 것은 “폐쇄성”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현인애 교수] “어릴 때부터 닫힌 세계에서 살고 대학에 가서라도 좀 열렸으면 좋겠는데 닫힌 세상에 계속 살다 보니 아까운 인재들이 다 (머리가) 굳어지는 거죠. 세상과 닫아 놓고 (세계) 순위에 든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죠. 왜냐하면 사고의 자유가 없으니까. 세상을 볼 수 없으니까요.”
창의적으로 사고할 자유가 거의 없고, 중앙 당국이 검열한 제한적 자료를 속도가 느린 인트라넷으로 검색하다 보니 연구개발이 더딜 수밖에 없다는 설명입니다.
김일성종합대 출신으로 한국 연세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언론인으로 활동 중인 주성하 ‘동아일보’기자는 김일성종합대와 외부의 대학은 목적 자체부터 차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주성하 기자] “김일성대학의 정의는 ‘민족 간부 양성 기지’입니다. 그런데 내셔널이란 게 얼마나 협소합니까? 세계 모든 대학이 글로벌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데, 민족 간부는 글로벌과 반대잖아요. 그러니까 대학 자체가 일단 폐쇄적이죠. 북한 자체가 폐쇄적이니까.”
이런 간부 양성 목적으로 북한의 최고 인재는 전체 학생의 20%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평양의 권력층 자녀들과 핵심 기관 종사자들이기 때문에 진정한 인재 양성에도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한국 통일교육원은 김일성종합대 합격자 선발에 “철저한 신분 검사가 필수적”이라며 출신성분과 정치조직생활 점수가 합격자 평가 기준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설명합니다.
출신성분이나 특혜 없이 시험 성적 등 실력으로만 엄격히 평가해 합격 여부를 결정하는 한국의 교육평등 시스템과 큰 간극이 있다는 지적입니다.
김일성종합대 영문과 출신으로 중국 베이징에서 유학 중 한국에 망명해 고려대에 다니면서 인기 ‘유튜버 (난세일기)’로도 활동 중인 김금혁 씨는 북한 최고의 대학에 다닌다는 자부심이 중국에 나온 뒤 깨졌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금혁 씨] “김대는 제가 원하는 과목을 선택할 수 없고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모든 과목이 다 스케줄이 맞춰져 있습니다. 저희는 듣기만 하면 되죠. 어떻게 보면 편리해 보이지만, 과목 선택의 자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 굉장히 큰 제한이죠. 근데 북경어원대에서는 제가 원하는 수업을 들을 수 있고 시간대도 조정할 수 있고, 수업 내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김대보다 훨씬 선진적이란 느낌을 받았죠.”
아울러 남북한의 대학들이 주입식 교육은 비슷하지만, 한국에서는 동아리와 학회 활동이 활발해 다양한 배움을 체험할 수 있는 반면 “김대에서는 오직 조직생활과 수령에 대한 경직된 충성을 강요하는 게 다르다”는 겁니다.
김 씨는 베이징 유학 사흘 만에 인터넷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다며, 북한 최고의 대학생들이 이 정보의 바다와 글로벌 소통 공간을 누릴 수 없다는 게 “수치스럽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금혁 씨] “참 21세기도 20년이 지나서 2020년인데도 아직 인터넷 보급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은 교육기관으로서는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고, 북한 당국이 가릴 수 없는 부분을 억지로 가리려는 부분이 안타깝기도 하죠."
현인애 교수는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여파로 인터넷 화상 강의를 하면서 인터넷의 역량에 새삼 놀랐다며, 김대 학생들에게 인터넷을 보급한다면 스스로 깨닫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교육과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현 교수와 주성하 기자는 그러나 외부 정보를 체제 유지의 걸림돌로 보는 북한 정권의 기조가 바뀌지 않는 한 인터넷 보급은 당장 어렵고, 일부 전시성으로 이뤄져도 학교에 보위부가 존재하는 한 사상검열 때문에 학생들의 정치범 수용소 행렬이 늘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박경애 교수는 해외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평양의 대학들과 시스템이 점차 발전하고 있다며, 북한 정부가 외국 대학들과의 교류를 더욱 확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박경애 교수] “더 많은 교류가 외국 대학과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학자나 학생들이 외국 기관에서 교육받을 기회가 넓어지면 좋겠고, 반대로 밖에서도 들어가 가르치고 협력할 기회가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박 교수는 북한 학생들과 교수들이 이런 교류 확대를 통해 배운 최신 지식과 과학기술로 북한의 지식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고, 외국과의 상호 이해도 넓혀 향후 협력 기반을 확대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