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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60주년 특집] 한국전쟁 60년 뒤 남북한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로 60주년을 맞았습니다.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지 5년 만에 발생한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양분 된 공산 진영과 자유 진영 간 대리전 성격을 띤 분쟁으로,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 축으로 하는 동서 간 냉전이 본격화 됐습니다. 미국은 북한 공산군의 불법 남침으로 시작해 3년 간 계속된 한국전쟁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고, 미국 외에도 전세계 15개국이 유엔의 깃발 아래 남한을 지원했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9회에 걸쳐 한국전쟁을 되돌아보는 특집방송을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그 여덟 번째로 이연철 기자가 ‘한국전쟁 60년 뒤 남북한: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 선진국으로’ 편을 보내드립니다.

지난 해 11월25일,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특별회의가 열린 프랑스 파리. 한국이 선진국들의 모임인 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에 24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음을 알리는 의사봉 소리에 이어 박수가 울려 퍼집니다. 이로써 한국은 6.25 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는 2010년을 기점으로 원조 선진국으로서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개발원조위원회의 에크하르트 도이처 의장은 한국의 가입 신청을 승인하면서 앞으로 역할에 큰 기대를 나타냈습니다.

“한국이 이제 원조국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앞으로 개발원조위원회의 중심국이 될 것입니다.”

미국과 유럽을 제외하고 선진국 원조기구에 가입한 것은 일본과 한국 두 나라 뿐입니다. 특히, 60년 전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한국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바뀌었고, 이는 개발도상국들에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6.25 전쟁 이후 국제사회의 원조로 연명했던 한국이 60년 만에 원조 선진국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3년 간의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했고,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한국은 국제 원조로 연명하는 절대빈곤 나라였고, 교회와 학교 등에서 나눠주는 밀가루와 옥수수 등 구호 식량이 생명줄의 전부였습니다.

국제 구호단체인 월드 비전의 박준서 미국본부 아시아 후원개발 부회장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월드 비전이 한국에서 전쟁 고아와 미망인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시작할 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 엄마가 아이를 안고 서울역 광장 어귀의 빌딩, 다 무너진 빌딩 옆에서 아이 젖을 먹이고 있는데, 얘가 아무리 젖을 빨아도 젖이 안 나오니까 얘는 배고파서 계속 울고, 엄마는 젖이 안 나와 못 먹이는 마음이 안타까워 울고….”

1950년 이후 월드 비전의 도움을 받은 한국 어린이는 40만 명을 넘었고, 지원을 받은 금액도 1억 달러를 넘었습니다. 이 밖에도 다양한 민간 구호단체들이 한국을 지원했습니다.

한 때 100개를 넘었던 국제 민간단체들은 한국 정부 보다 훨씬 더 많은 구호자금을 사용하면서 한국 국민들이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계 정치인으로 꼽히는 신호범 워싱턴 주 상원 부의장도 이 때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네 살 때부터 아버지 없는 고아가 돼 가지고 혼자서 서울역에서 살고, 얻어먹고 자랐습니다. 6.25 사변 때 미국에서 오신 미군 분의 입양아로 가서 미국에 가서 ABC를 배우면서 검정고시 해서 박사까지 받고, 대학교 교수 30년 했습니다. 지금은 또 정계에서 상원 부의장까지 돼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은 민간 차원의 지원 외에 1백억 달러가 넘는 공적 지원도 받았습니다.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6백억 달러가 넘는 막대한 금액입니다. 한국은 이 같은 국제사회의 지원과 배려를 바탕으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면서, 민간단체들을 중심으로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의 역사적인 전환을 시작했습니다.

1991년 월드 비전 한국본부는 외국으로부터의 지원을 완전히 청산하면서 대신 다른 나라들을 돕는 후원국의 역할을 맡기로 결정했습니다. 월드 비전 미국본부 박준서 아시아 후원개발 부회장의 설명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도울 때가 됐는데, 언제까지 백 년 만 년 받아먹고 살거냐, 올림픽도 한 나라가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이제 우리가 다른 나라를 돕는 나라로 탈바꿈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로부터 약 20년이 흐른 지금, 90개 가까운 한국의 민간단체들이 전세계 80여 개 나라에서 긴급 구호와 의료보건, 교육 등의 지원 사업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 정부는 1995년에 세계은행의 개발차관을 받은 것을 마지막으로 원조받는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졸업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가난한 나라들을 돕는 일에 나서기 시작한 한국 정부는 지난 해 선진국 원조기구 가입을 계기로 대외 원조를 크게 늘려 2015년에는 30억 달러 규모까지 확대할 계획입니다.

미국 워싱턴 소재 민간단체인 미국기업연구소의 니콜라스 에버스타트 연구원은 한국이 전쟁이 있은 지 60년 만에 원조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것은 눈부신 경제발전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냉전시대 한국경제의 성장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눈부신 것입니다. 이 같은 성장은 1960년대 초반부터 시작됐습니다. 이 때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수출 중심 경제구조를 갖추면서 비약적인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60주년을 맞는 지금도 북한은 외국의 원조를 받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 북한은 올해 2천 4백만 명이 필요로 하는 식량의 25% 정도가 부족해 국제사회의 식량 원조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최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세계식량계획 WFP의 레나 사벨리 북한 담당 대변인은 북한 내 활동 상황을 담은 동영상에서 이 같이 국제사회의 원조를 호소했습니다.

워싱턴 소재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마커스 놀란드 연구원은 북한이 자력갱생을 외치면서도 외부의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은 정부 당국의 잘못된 경제정책 탓이라고 지적합니다.

“특히 지난 10년 간의 북한 경제정책을 되돌아 보면 북한이 지난 해 단행한 화폐개혁이 분수령이 될 것입니다. 주민들이 모은 재산을 빼앗은 그 같은 화폐개혁은 치명적인 경제적 재난입니다.”

탈북자 출신으로 워싱턴의 미국북한인권위원회 방문연구원인 김광진 씨는 만성적인 경제난에 직면한 북한 당국이 점점 더 외국의 원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90년대 중 후반에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지 않았습니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원조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거기에 또 점점 더 습관이 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북한 당국은 고마움을 표시하기 보다는 해외원조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외교력이나 선군정치의 위력이라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펴고 있다고, 김 연구위원은 말했습니다. 김 연구위원은 또 북한 당국이 주민들에게 돌아갈 원조 물품을 빼돌려 군부와 특권계층에게 나눠 주거나 핵실험 등에 전용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한국 정부와 민간단체들이 참전용사들을 초청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대부분 80살을 넘긴 이들 참전용사들은 60년 전의 폐허를 딛고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변모한 한국의 발전상을 보면서 자신들의 희생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음을 직접 확인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한국을 방문했던 올해 84살의 참전용사 더글라스 맥클러스터 씨는 한국전쟁에 참가한 것은 아주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한국을 위해 전쟁에 참여할 일이 있으면 주저 않고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한국전쟁 참전은 바람직한 일이었으며 옳은 일이었습니다.”

6.25 전쟁 60년을 맞은 지금 한국은 세계 15위의 경제대국이자 원조 선진국으로 거듭났습니다. 반면, 북한은 식량 등 가장 기본적인 생필품마저 외부의 원조에 의존해야 하는 극심한 빈곤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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