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유례없는 인해전술을 펴며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1950년 겨울.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한국군과 미군 등 유엔군은 남으로 남으로 퇴각했습니다.
황해도 해주 바닷마을에 살던 16살 소년 이강훈 군에게도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이강훈: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잡혀가시고 우리만 남았어요. 그러니까 이웃에 있는 사람들이 너희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말이야, 얘기하는 바람에 여동생 남동생 삼 남매가 내려온 거예요.”
1950년 겨울, 이강훈 씨는 13살 여동생과 9살 남동생의 손을 꼭 붙잡고 피난행렬에 합류했습니다.
이강훈: “걸어 내려오는데 경계선 오니까 사람들이 막 죽어서 여기저기 있는데, 미군들이 트럭을 가지고 왔어요. 그래 가지고 막 태우는 거에요 그냥. 어린애들을 갖다가..”
운 좋게 미군 트럭을 얻어 타고 서울까지 내려온 이강훈 씨는 살 길을 찾기 위해 한 동사무소를 찾아갔습니다. 그 곳에서 강훈 씨는 종로국민학교에서 전쟁 고아들을 모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 곳은 당시 미 제5공군 사령부 소속 목사였던 러셀 블레이즈델 대령이 서울시청의 도움을 받아 급조한 고아원이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의 기억을 아들 카터 블레이즈델 목사는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Each morning it was like the dawn patrol would go up and round up the orphans who were found …
“당시 아버지는 매일 새벽 폐허가 된 서울 시가지를 돌며 도로변과 다리 밑에서 어린이들을 트럭에 태웠습니다. 처음 입소하는 아이들은 큰 철통에 물을 받아 씻기고, 의료 검진과 치료를 해야 했는데, 하루에 50명 이상은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하루 50 명 밖에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
수용 인원은 금새 1천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서울의 모든 아이들을 돌볼 수는 없었기에 부모가 있거나 10대 후반 아이들은 내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평온도 잠시. 서울에는 다시 전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습니다.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던 1950년 12월, 서울 시민들은 봇짐을 싸고 다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수십만 명의 중공군이 평양을 탈환하고 38선을 넘으며 거침없이 남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아들을 돌보고 있던 러셀 블레이즈델 대령도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 했습니다.
Dad had been told by the Korean air force that they would have an LST ship at Incheon on December
“아버지는 한국 공군이 12월 15일 인천 부두에서 탱크 상륙용 LST선박을 동원해 제주도까지 시멘트 3천 부대를 옮기려는 계획을 알게 됐습니다.”
고아들을 태워 주겠다는 한국 공군의 약속을 받은 블레이즈델 대령은 9백 50 명의 아이들을 인천 부두로 데려갔습니다. 하지만 약속된 시간이 돼도 선박은 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이렇게 나흘이 지났습니다.
It was a small building, unheated, and there were different diseases breaking out. The two most common
“아버지는 아이들을 인천 부두 근처의 작은 학교 건물에 대기시켰습니다. 그런데 난방시설도 위생시설도 마련되지 않은 건물에서 버티던 아이들 사이에서 백일해와 홍역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어린아이 8 명이 추위와 질병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시간은 가고, 러셀 블레이즈델 대령은 점점 초조해졌습니다. 12월 20일에는 인천 부두를 지키고 있는 미군 대대 병력도 퇴각할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He is very desperate so he goes back to the 5th Air Force headquarters office and of course as he goes
“아버지는 절박한 심정으로 제5공군 사령부를 찾아갔습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퇴각하고 텅빈 사령부에서 기적적으로 작전 사령관인 T.C. 로저스 대령을 만났습니다.”
로저스 대령은 총사령관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비행단의 출격 명령을 내릴 권한이 있었습니다.
Colonel Rogers reaches for a telephone and
“로저스 대령은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더니 마침 C-54 수송기가 일본에서 대기하고 있다며 다음 날 오전 8시까지 김포공항으로 보내겠다고 말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죠.”
다음 날 아침 블레이즈델 대령은 부두에서 트럭을 찾아 헤맸습니다. 아이들을 인천에서 김포까지 옮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가까스로 아침 7시가 넘어 낡은 배에 시멘트를 싣고 있던 해병대 트럭을 몇 대 발견해 아이들을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16살로 고아들 틈에 섞여 있었던 이강훈 씨는 급박했던 상황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강훈: “그 목사님이 애들을 빨리빨리 옮겨야 하니까 허리 허리 그러는 거예요. 나중에 알아보니 빨리빨리 라는 말이더라고.”
약속 시간을 2 시간이나 넘겨 김포공항에 고아들이 도착했을 때, 제5공군 소속 C-54 수송기 16대가 적군의 폭격을 받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기적이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힘까지 써가며 버텨낸 아이들은 공군 병사들에게 안겨 비행기에 실렸습니다. 강훈 씨는 난생 처음 타는 비행기였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아 그때 모르죠. 왜냐하면 생각이 부모님 없이 우리끼리죠, 하니까 그런 거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저는 비행기 타는데 무섭지도 않더라고요.”
강훈 씨와 다른 1천 여명의 고아들과 함께 구출됐던 수지 앨런 씨도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앨런 씨는 제주도로 옮겨진 몇 년 뒤에 미국으로 입양됐습니다.
I was shoved on an airplane. We’re all pack
“우리는 비행기에 정어리처럼 빽빽하게 실렸어요. 매우 좁았던 기억이 나요. 우리는 모두 울었죠.”
몇 시간 후 비행기 14대가 제주도에 무사히 착륙했습니다. 두 대는 엔진 문제로 부산과 일본으로 우회해 다음 날 도착했습니다. 블레이즈델 대령은 당시 심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 처음으로 안도감이 내 몸을 휘감았다. 고아원 직원들은 기뻐 환호하며 껴안았고, 몇몇 아이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오르기까지 하였다.”
1950년 12월 20일, 미 공군 군목이 1천 여명의 고아를 수송기에 실어 생명을 구한 이야기는 미군이 한국전쟁 도중 어린이들에게 보여줬던 사랑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조지 드레이크 박사는 평가했습니다.
1952년 미 육군 정찰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드레이크 박사는 외교관과 대학교수를 지낸 뒤 은퇴해 한국전쟁 고아들을 위한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www.koreanchildren.org)
During the war those 3 years of the Korean
“한국전쟁 3년 기간 동안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등 모든 병사 들이 약 1만 명 어린이들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월급이 50달러 60달러 밖에 되지 않는 미군 병사들이 2백만 달러 이상을 걷어 고아원들을 지원했습니다. 4백 개의 고아원에 있는 5만4천 명의 고아들을 후원했습니다. 우리는 고향의 어머니, 아버지, 친척, 친구, 이웃에 편지를 써 한국 어린이들을 위해 돈을 부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병사들이 총을 겨누는 방법은 배워야 했지만, 어린이를 돕는 것을 배울 필요는 없었습니다. 미국인이면 누구나 실천하는 가치입니다.”
서울에서 미 공군 수송기로 구출돼 제주도의 고아원에서 자란 수지 앨런 씨입니다.
“Well. I loved American soldiers. Because they always brought us treat and stuff”
“나는 당시에 미군들을 매우 좋아했어요. 미군들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간식거리를 가지고 찾아오곤 했었죠. 위험을 뚫고 우리를 구출해 준 블레이스델 대령님은 멋진 분이에요. 그 분이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죽었을 거예요”
블레이즈델 대령은 지난 2001년 91살의 나이에 전쟁 이후 처음으로 다시 한국을 방문해 당시 자신이 구했던 고아들과 감격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블레이즈델 대령은 그때의 만남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미국의 소리, 조은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