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따라잡기] 우산혁명

대규모 민주화 시위인 '우산 혁명' 1주년을 맞은 지난해 9월 28일 홍콩 정부청사 앞에 노란 우산을 든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뉴스의 배경과 관련 용어를 설명해드리는 뉴스 따라잡기 시간입니다. 지난 2014년 9월 홍콩의 행정장관 직선제 후보 제한 등에 반발한 홍콩의 시위대가 홍콩 경찰의 최루탄 세례에 맞서 우산을 들고 저항하면서 시작된 우산혁명이 2주년을 맞았습니다. 최근 치러진 홍콩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우산혁명 당시 시위를 이끌었던 청년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행보가 주목되고 있는데요.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우산혁명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조상진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우산혁명을 촉발한 홍콩의 민주화 열망”

홍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홍콩의 독특한 정치 체계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래는 중국의 아주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던 홍콩은 1842년 영국과 중국의 제 1차 아편전쟁 이후 영국에 의해서 만들어진 ‘계획 도시’인데요. 아편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국이 홍콩을 식민조차지로 선택하면서 이후 공산국가가 된 중국과는 달리 홍콩은 영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99년이 지나고 1997년 7월,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면서 중국은 이른바 ‘일국양제’를 선언합니다.

[녹취 : 퉁치화 홍콩 초대 행정장관]

“홍콩은 하나의 국가, 두개의 제도라는 길을 향해 전진한다”는 퉁치화 홍콩 초대 행정장관의 홍콩 반환식에서의 연설내용을 들어보셨는데요. 즉, 하나의 중국이지만 2047년까지 50년 동안은 다른 정체, 경제, 사법 체제를 유지하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홍콩 정부의 수반이라고 할 수 있는 홍콩 행정장관은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를 통해 선출하도록 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친중파가 당선되기 쉬운 구조였는데요. 이 때문에 꾸준히 행정장관 직선제 요구가 홍콩 사회 전반에 있어왔고, 이에 따라 2017년부터 홍콩 시민의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한다는 안이 통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마저 중국의 의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과반수 지지를 얻은 사람들로 후보자들을 추린 다음, 홍콩 시민이 직접 선거를 통해 그 가운데 한 명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결정되면서 성난 홍콩 시민들의 민심이 거리로 뛰쳐나오게 된 것입니다.

“시위를 이끈 어린 학생들”

2014년 8월 31일 중국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회가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를 사실상 거부하면서 9월 22일 홍콩의 주요 대학들이 동맹 휴학을 선언하고 민주화 요구에 먼저 나서게 됩니다. 그러나 시위 초반 상당수의 시민들은 그렇게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요.

9월 26일과 27일, 양일간 밤부터 아침까지 고등학생들까지 참여한 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지고 50여 명의 학생이 체포되면서 시위가 본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한 고등학생이 정부 청사 앞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다 청사 진입을 시도해 경찰에 체포되는 과정에서 전국에 방송된 TV 화면을 통해 한 말은 이후 수많은 홍콩 시민들을 광장으로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녹취 : 조슈아 웡]

학생 시위를 이끈 고등학생 조슈아 웡의 목소리 들어보셨는데요. 웡은 “10년 후 초등학생들이 홍콩의 민주화를 위해 시위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이것은 우리의 책임” 이라고 말하면서 일약 시위의 주역으로 떠올랐습니다.

시위대는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식사를 하고,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등 비폭력 시위를 이어나가고, 홍콩 경찰이 진압을 위해 최루탄을 쏘았을 때도 우산을 펴 최루탄을 받아냈는데요. 덕분에 우산혁명이란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비폭력 시위는 시민들의 지지를 더욱 이끌어 냈고 우산혁명은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74일 만에 접힌 우산”

홍콩의 우산혁명은 이후 시위가 장기화됨에 따라 힘이 분산되고 시민들도 피로감을 호소하면서 동력을 조금씩 잃어갔습니다.

그러면서 2014년 12월 11일 마지막까지 시위 현장에 남아있던 학생들이 연행되면서 우산혁명을 상징했던 노란 우산은 74일 만에 접히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일국양제는 경제분야에만 해당될 뿐 정치 분야는 관계없다’는 중국 당국의 권위주의적 대응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가 줄을 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중국 정부가 시위를 진압했지만 홍콩 내 반중 정서와 세력을 키운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민단체와 중, 고교생, 대학생으로 나눠진 지도부가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못한 것과 시위대 탓에 다수의 시민이 불편을 겪고 법치가 타격을 입었다는 비판적 여론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시위대에서 정당으로 - 조슈아 웡과 데모시스토”

우산혁명과 시위대를 상징했던 10대 고등학생 조슈아 웡은 13세였던 2010년부터 사회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7세가 되던 해 그가 이끈 우산혁명은 직선제 요구안을 관철시키진 못했지만, 전 세계에 홍콩 시민의 민주화 열망을 알렸다는 평가를 받았는데요, 2015년 포춘지에서는 그를 세계에서 10번째로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조슈아 웡과 함께 시위를 이끌었던 학생들은 시위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으로 힘을 모아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요구를 관철할 필요성을 절감했는데요.

2016년 4월 ‘데모시스토’란 이름의 정당을 창당하고 나이가 어려 출마에 제약이 있는 조슈아 웡을 대신해 네이선 로가 입법회 의원에 출마했고, 23세로 역대 최연소 당선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녹취 : 네이선 로]

네이선 로는 “이번 선거 결과는 시민들이 변화를 원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긴 것”이라고 평가했는데요. 이 외에도 우산혁명의 당사자이거나 지지를 보냈던 2~30대 청년 정치인이 대거 당선되면서 향후 홍콩의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진행될 것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습니다.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홍콩의 우산혁명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조상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