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의 공약이 당선 뒤 곧바로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오바마와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을살펴보면 후보 시절이나 정권 출범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경우가 많았습니다. 매주 수요일 깊이 있는 보도로 한반도 관련 현안들을 살펴보는 ‘심층취재,’오늘은 최근 미 대통령들의 출범 전후 대북정책이 어떻게 변했는지 김영권 기자가 보도합니다.
지난 2008년 미 대선 민주당 후보 경선 토론회.
바락 오바마 후보는 집권 첫 해에 북한이나 이란, 시리아, 쿠바 등 적성국 지도자들을 조건 없이 만날 용의가 있냐는 사회자 질문에 “만날 용의가 있다”고분명하게 답변합니다.
[녹취: 오바마 당시 후보] “I would. And the reason is this, that the notion that somehow not talking to..”
특정 국가들과 대화하지 않는 게 그 나라들에 대한 처벌이라는 부시 행정부의 외교 원칙은 터무니 없다는 지적입니다.
당시 민주당 경선 상대였던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 대선 상대였던 공화당의 존 맥케인 후보는 모두 순진하고 위험한 발상이라며 오바마 후보를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1월 취임사에서 거듭 적성국 지도자들과의 대화 의지를 밝혔습니다.
[녹취: 오바마 대통령] “To those who cling to power through corruption and deceit and the silencing of dissent, know that..”
부정부패와 반대자들에 대한 탄압으로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국제 지도자들은 역사의 잘못된 쪽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이들이 움켜진 주먹을 펴면 미국도 손을 내밀 것이란 겁니다.
또 핵 문제 해결을 위해 오랜 우방 뿐아니라 적들과도 함께 노력할 것이라고 밝혀 사실상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과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특히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대선 공약 이행을 위해 대북정책도 대화와 협상 기조로 나아가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내비쳤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해 4월에 장거리 로켓 발사에 이어 5월에는 2차 핵실험을 강행하며, 대화와 협상 의지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녹취: 조선중앙TV] “자위적 핵 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2009년 5월 25일 또 한 차례 지하 핵 시험을 성과적으로 진행하였다”
핵 없는 세상을 주창했던 오바마 대통령은 이에 분노하며 “무모한 행동을 멈추라”고 비난했습니다.
[녹취: 오바마 대통령] “I strongly condemn their reckless action…”
오바마 대통령은 이후 국제 비확산 체제 유지를 위해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를 지지하며 이른바 `전략적 인내’ 정책으로 노선을 바꿉니다.
불과 몇 달 만에 대화와 협상 노선이 제재 분위기로 전환된 겁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김정은 정권 출범 직후인 2012년, 북한과 2.29 합의에 서명하며 다시 북한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려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불과 보름여 만에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자 스위스 유학파 출신의 젊은 지도자에 대한 기대를 접습니다.
북한이 비핵화에 진정성을 보이지 않으면 대화는 불필요하다는 `전략적 인내’는 이후 지금까지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로 자리잡았습니다.
결국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압박과 제재는 역설적으로 과거 공화당 정부 등 역대 어떤 미 대통령 때보다 훨씬 더 강력해 졌습니다.
전임 조지 W. 부시 대통령 역시 출범 때와 이후 대북정책에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특징적인 것은, 오바마 대통령과는 반대로 대북 강경책에서 대화와 협상으로 선회한 겁니다.
부시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인 2000년, 빌 클린턴 행정부의 것은 어떤 것도 안 된다는 의미의 이른바 `ABC’ (Anything But Clinton) 구호를 강력히 내세웠습니다.
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대북 포용정책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동결에 따라 경제적, 인도적 지원을 제공했고, 조명록 당시 북한 인민군 차수의 워싱턴 방문과 메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평양방문이 성사되면서 미-북 간 화해 분위기는 최고조에 올랐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에 부응해 미 대선을 전후해 평양 방문까지 진지하게 검토했었습니다.
하지만 부시 후보 측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2000년 8월 공화당이 부시를 대선 후보로 선출한 뒤 전당대회에서 채택한 정강은 “한국은 미국의 소중한 동맹이지만 북한은 국제 체제 밖에 남아 있다”며 북한과의 관계에 선을 그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외교안보 참모들은 대부분 북한을 단호하게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부시 후보 선거본부의 입장은 백악관 입성 후 발생한 9.11 테러와 함께 초강경 대북정책으로 진화합니다.
부시 전 대통령은 2002년 1월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지목하고 정권교체까지 추구합니다.
[녹취: 부시 대통령] “North Korea is a regime arming with missiles and weapons of mass destruction, while starving its citizens…”
부시 대통령은 “국민이 굶주리는데도 북한 정권은 미사일과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폭군”, “국민을 굶기는 독재자”로 비난하고 탈북민 대표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북한 정권의 인권 유린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어 2002년 10월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당시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북한의 우라늄 농축 사실을 추궁했고, 북한이 영변의 국제원자력기구(IAEA)감시 요원들을 추방하면서 이른바 `2차 핵 위기’가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위기가 고조되고 해법은 보이지 않자 부시 대통령은 정부 내 네오콘, 즉 신보수주의 세력 대신 대화파의 손을 들어주기 시작했고, 결국 6자회담이시작됐습니다.
이런 대화 구도는 특히 2005년 부시 2기 행정부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주도하며 탄력을 받았고,북한의 비핵화 결의를 이끈 9.19 공동성명을 도출했습니다.
게다가 2006년 의회에서 민주당이 상하 양원을 모두 장악하면서 부시 행정부 내 대북 강경파들의 입지는 더 약화됐고, 이후 2007년 2.13 합의와 10.3 합의가 이어졌습니다.
2008년 2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평양 공연은 6년 전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을 무색하게 할만큼 정책의 대 반전을 확인하는 신호탄이었습니다.
[녹취: 뉴욕 필하모닉의 평양공연 아리랑 연주]
이와 동시에 북한의 핵 가동 중단과 영변 냉각탑 폭파, 핵 불능화 진전, 미 정부의 식량 50만t 지원 발표, 테러지원국 해제 등 미-북 관계 진전이 숨가쁘게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려됐던 핵 검증 절차에서 북한이 비협조 자세를 보이면서 정체에 빠졌고 부시 행정부는 마무리를 못한 채 물러나게 됐습니다.
지난 두 행정부를 돌이켜 보면 대북정책은 대선 후보 때와 출범 초기, 중간과 마무리가 모두 달랐습니다.
미 전문가들은 이런 급한 정책 변화 사례를 볼 때 내년 1월에 출범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어떤 대북정책을 펼칠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