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미국인의 한 명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는 난민들의 이야기, ‘나는 미국인입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엔 한국 전쟁에서 전사한 수천 명의 미군 용사들을 기리는 한국전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곳엔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죠. 오늘 만나볼 주인공 역시 자유의 가치가 얼마나 크고 귀한지를 절실히 체험한 난민들인데요. 미국인 단체를 위해 일했다는 이유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고 미국으로 오게 된 타밈 알말리키 씨와 알리 알말리키 씨 남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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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 타밈 알말리키]
“가게를 갔는데 가게 점원이 저를 너무 불쌍하게 쳐다보는 거예요. 이해할 수 없었죠. 그리곤 거리로 나왔는데 또 다른 사람이 저를 너무 애처롭게 쳐다보는 거예요. “다들 왜 이러나?” 하고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만난 이웃이 동네를 한번 둘러보라고 하는 거예요. 살펴봤더니, 동네 벽마다 저를 살해하겠다는 협박의 글이 적혀 있었죠. ‘너는 미국의 간첩이다, 미국인을 위해 일했으니 너와 너의 동생들을 죽이겠다.’”
미국이 운영하는 민간단체, NGO에서 일했던 타밈 알말리키 씨는 살해 협박을 받은 후 집 안에서 숨어 사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결국, 2007년에 바로 아래 동생인 알리 씨와 함께 요르단으로 건너가게 됐는데요. 난민 자격으로 미국에 오기까지, 길게는 10년도 기다려야 하는 다른 이라크 난민들과 달리 알말리키 남매는 5개월 만에 미국에 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타밈 씨는 집에 꽂혀 있던 책 한 권을 꺼내 들었습니다.
[녹취: 타밈 알말리키]
“제가 들고 있는 이 책은 이라크에서의 미국 NGO들의 활동을 담은 ‘이라크의 혼돈’이라는 책이에요. 이 책의 저자는 토마스 레나한 박사인데요. 조지타운 대학의 정치학 교수이자, 저의 전 상사이고, 저희 남매의 미국 입국을 도운 초청인이기도 하죠. 레나한 박사는 미국의 ‘국제개발처(USAID)’가 진행한 ‘이라크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분인데요. 제가 이 분 밑에서 부국장으로 일했었죠. 이 책을 보면 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제 동료는 살해 협박을 받은 직후 살해당했지만 저는 살해 협박을 받은 후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숨어서 지냈기 때문에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쓰고 있어요.”
미국인이나 미국 단체를 위해 일했다는 이유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은 경우, 미국 난민 입국 절차가 빨리 진행됐다고 하는데요. 타밈 씨의 경우 본인이 살해 협박을 받은 것도 있지만, 미국 NGO들 사이에서 유명인사였던 동생 하이더 씨의 죽음으로 미국 입국이 더 앞당겨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타밈 알말리키]
“이 책 12장의 소제목이 ‘음악이 사라진 날’이에요. 제 동생이 죽은 날을 그렇게 묘사한 거죠.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비탄에 빠졌다. 알말리키 가족은 이라크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다. 6명의 자녀 모두 매우 명석했는데,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보석과 같은 한 아들을 죽였다. 살해된 하이더 알말리키는 이라크의 미래였다.’라고요”
하이더 씨는 지난 2006년, 가족들과 26번째 생일을 축하한 지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알리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녹취: 알리 알말리키]
“수도 바그다드에서 일하고 있던 동생이 스위스 유학을 앞두고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잠시 들렀어요. 그런데 당시는 2006년 독일 월드컵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죠. 동생은 영국팀 경기를 보기 위해 집의 위성 안테나를 점검하다가 고장 난 부품을 사려고 철물점에 잠시 들렀어요. 동생이 택시를 타고 가고 있는데 갑자기 복면을 쓴 괴한 네 명이 나타나 동생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죠. 우리 동네에서 그렇게 처참하게 죽은 사람은 여태껏 없었어요. 이후, 지역에서 활동하던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인 것이 드러났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라크의 미래’라고 불리던 인재의 죽음으로 가족은 물론 NGO 단체들도 큰 충격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녹취: 알리 알말리키]
“우리 동생은 평화주의자였어요. 이라크의 아이들을 돕기 위해 활발히 활동했죠. 스위스에서 장학금을 받고 박사 과정에 뽑힐 정도로 실력도 뛰어났고요. 우리 마을의 모든 NGO 단체들이 하이더와 같이 일하고 싶어할 만큼 영어도 잘하고, 똑똑하고, 성실했어요. 하지만 살해 협박 때문에 우리 마을에 살 수 없어서 수도 바그다드로 떠나야 했죠. 그런데 가족들에게 잠시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가 영원한 작별을 하게 된 겁니다.”
알리 씨는 미국에서 이렇게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기까지 너무 많은 희생이 따랐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알리 알말리키]
“이라크 사람들에게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어요. 우리 삼촌 두 분은 사담 후세인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살해당했고요. 대를 이어서 사촌들과 우리 동생까지 희생됐으니까요. 자유를 얻기 위해 너무 큰 희생이 따랐어요. 우리 가족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라크의 많은 가정이 비슷한 경험을 해야만 했습니다.”
[현장음: 타밈 알말리키 씨 집]
과거 힘들었던 경험은 어느덧 추억이 된 듯...타밈 씨와 알리 씨의 대화엔 이제 여유로운 웃음이 묻어납니다. 며칠만 있으면 핼러윈데이라며 좋아하는 두 사람. 핼러윈은 유령이나 괴물 복장을 하고 파티를 하거나, 아이들이 분장을 하고 이웃집에 찾아가 사탕을 달라고 하는, 조금은 괴기한 분위기의 미국 휴일인데요. 핼러윈을 기다리는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녹취: 타밈 알말리키]
“2007년 핼러윈데이 이틀 전에 미국에 왔어요. 그래서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미국의 명절이 핼러윈이에요.”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타밈 씨는 핼러윈이라는 조금은 낯선 명절과 함께 미국 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녹취: 타밈 알말리키]
“미국 동부 메릴랜드주에 정착했고요. 터키인 가정의 집 지하에서 생활했는데 집주인이 주미 터키대사관의 요리사였거든요. 매일 터키 음식을 먹으며 터키 사람들과 친분을 쌓으며 미국 속의 터키인처럼 살았죠. 미국 생활에 익숙했던 터키인 가족이 우리 남매의 미국 정착에 큰 도움을 줬어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핼러윈이 제일 좋아하는 명절이고, 터키 음식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독특한 취향을 갖게 된 타밈 씨, 미국에 정착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을까요?
[녹취: 타밈 알말리키]
“저는 미국에 오기 전인 2005년에 영국과 캐나다에 있는 NGO에서 각각 2달씩 인턴쉽, 즉 수습 직원 교육을 받았어요. 그래서 사실 저는 서방세계에 익숙한 편이었고요. 또 미국에 오자마자 NGO에서 일했거든요. 이라크에서 했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미국에 적응하는 게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동생 알리의 경우는 조금 달랐어요. 알리는 쿠웨이트와 요르단에서 일한 적은 있지만, 서방세계는 처음이었거든요. 거기다 영어도 저보단 못하는 편이라 미국에 와서 처음엔 고생을 좀 했습니다.”
타밈 씨와 알리 씨는 하지만 여러 고생 끝에 대학 공부도 하고, 번듯한 직장도 갖게 됐는데요. 다름 아닌 아랍어 통역을 하는 남매 통역사가 된 겁니다.
네, 미국에 정착한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이라크 출신 타밈 알말리키 씨와 알리 알말리키 씨의 이야기와 함께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알말리키 남매의 직업 이야기와 앞으로의 꿈을 들어보려고 하는데요.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김현숙이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