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는 난민들의 이야기, ‘나는 미국인입니다’.오늘은 난민 출신으로 미국 서북부 몬태나주 헬레나시의 시장으로 뽑힌 윌모트 콜린스 씨를 만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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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7일 미국 내 몇몇 지역에서 지방선거가 진행됐습니다. 이날 선거는 내년에 중간선거 결과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경합주인 버지니아주와 뉴저지 주지사 선거 결과가 큰 관심을 끌었죠.
[녹취: 11월 선거 결과 뉴스 보도]
그런데 대통령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합주도 아닌데,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은 당선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 서북부 몬태나주의 작은 도시 헬레나시의 시장으로 뽑힌 윌모트 콜린스 씨인데요. 서아프리카 라이베리아 난민 출신으로 시장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녹취: 헬레나시 ‘언약연합감리교회’]
일요일 아침 헬레나시의 ‘언약연합감리교회’의 종탑에서 예배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산과 숲으로 둘러싸인 헬레나시는 인구 3만여 명의 아담한 도시인데요. 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이 교회에서 오늘의 주인공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녹취: 윌모트 콜린스] “선거일 직전 며칠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다 보니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유권자들을 만나러 다니고, 또 각종 행사에 참석하면서 이름을 알렸죠. 운명을 결정지을 투표일에는 선거운동원들 그리고 지지자들과 함께 한 식당에 모였습니다. 함께 개표 방송을 보고 있는데 밤 8시 30분쯤 아들이 식당 안으로 뛰어들어오더니 “아버지! 승리가 거의 확실해지고 있어요!”라고 외치는 겁니다. 시간이 갈수록 다른 후보와의 표 차가 벌어지면서 제 마음에도 점점 승리에 대한 확신이 생겼죠. 그리고 결국 승리가 확정됐는데요. 그때부터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습니다.”
23년 전, 난민 신분으로 미국에 첫발을 내디딘 윌모트 씨가 시장에 당선된 건 그야말로 뉴스 중의 뉴스였습니다. 당선 이후 미국은 물론이고 스위스와 스웨덴, 영국 등 20개가 넘는 전 세계 언론사로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녹취: 윌모트 콜린스] “당선 직후에 저는 전화를 꺼놓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기자들이 어떻게 제 아내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는지 아내 전화기에서 불이 나는 거예요. 아내는 저 보고 빨리 전화기 좀 켜라고 다그쳤죠. 그때부터 정신없이 인터뷰를 이어갔습니다. 이렇게 명성을 얻게 된 것도 참 기쁘지만, 우리 헬레나시 주민들에게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시민들을 위해 일할 기회를 제게 주셨으니까요.”
시장 출마를 선언한 후, 20명의 자원봉사자와 함께 도시 곳곳을 돌며 대문을 두드린 집만 800곳이 넘습니다. 주민 대부분이 백인인 곳에서 흑인으로 그것도 난민 출신으로 그다지 훌륭한 배경도 없는 사람이 시장에 출마한 것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죠. 하지만 윌모트 씨는 헬레나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갖은 고생도 기쁨으로 감내했습니다.
[녹취: 윌모트 콜린스] “선거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무척 설렜습니다. 힘들었던 선거운동이 기간이 끝나고 이제 진짜 일을 해야 할 때가 됐으니까요. 물론 제가 헬레나시가 직면한 모든 문제를 다 안다곤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직원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 우리 도시를 위해 일하겠다는 마음만큼은 간절합니다. 헬레나시에 앞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너무나 기대되고, 설레고 그렇습니다.”
윌모트 씨가 헬레나시를 이렇게 사랑하고 또 도시를 위해 일하는 시장이 돼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난민이었던 자신을 품어주고, 도와주고 또 꿈을 갖도록 해 준 곳이 바로 헬레나시이기 때문입니다.
[녹취: 윌모트 콜린스] “저는 아프리카 라이베리아 출신입니다. 1989년 내전이 발생하면서 수많은 민간인이 죽어 나가자 결국 서아프리카 평화유지군이 항구에 배를 보내줬습니다. 저는 그 배를 타기 위해 아내와 함께 부두에서 사흘을 줄 서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배를 타고 라이베리아를 떠났죠. 배가 어디로 가는지도 전혀 몰랐어요. 그렇게 망망대해를 떠 가다 도착한 곳이 가나였습니다.”
30살 청년의 나이에 난민 신분으로 가나에 도착한 윌모트 씨. 다행히 곧바로 일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녹취: 윌모트 콜린스] “저는 라이베리아에서 교사로 일했거든요. 가나에서도 민간 구호단체가 운영하는 가나의 한 학교에서 일할 수 있게 됐어요. 난민이었지만 교사로 일할 수 있으니까 행운이었던 거죠.”
하지만 아무리 교사라고 해도, 신분을 보장받지 못하는 가나에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아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됩니다.
[녹취: 윌모트 콜린스] “하루는 아내가 미국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말을 꺼내더라고요. 미국 어디냐고 물었더니 몬태나라고 하는데, 미국에 몬태나라는 주가 있는지도 몰랐던 저는 진짜 미국에 있는 주가 맞냐고 다시 되물을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제 아내 말이 고등학교 때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몬태나주 헬레나시의 한 고등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졸업 후 모국에 돌아와서도 미국에서 자기를 돌봐줬던 민박 가정과 계속 연락을 하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라이베리아에서 대학에 다닐 때 만난 아내에게 이런 사연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윌모트 씨, 조심스레 미국행의 가능성을 타진해보게 됩니다.
[녹취: 윌모트 콜린스] “그래서 제 아내가 몬태나 민박 가정에 전화를 걸어서 우리가 미국에 가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가정은 당연히 돕겠다고 했죠. 하지만 그분들은 우리를 미국으로 부르기 위해 뭘해야 할지,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할지는 전혀 모르셨던 겁니다. 하지만 그 미국인 부부가 지역 대학의 간호학과에 아내 대신 지원을 해줬고요. 아내는 결국 장학금을 받고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오게 됐습니다.”
하지만 유학길이 열린 사람은 아내뿐. 윌모트 씨는 여전히 가나에 있어야 할 처지였는데요. 거기다 아내가 유학길에 오르기 직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맞게 됩니다.
[녹취: 윌모트 콜린스] “아내가 미국에 가기 2주 전에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됐어요. 고민하다가 결국 아내는 임신한 몸으로 홀로 미국에 갔죠. 그래도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우등 졸업을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까지 미국에 갈 수 없었습니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난민 신청을 했지만 여전히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윌모트 씨는 결국 2년 7개월을 기다린 끝에 미국에 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녹취: 윌모트 콜린스] “미국에 왔을 때 딸은 벌써 2살이었습니다. 그때가 1994년 2월이었는데요. 아내가 미국에서 홀로 낳은 딸이 2살이 돼서야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던 겁니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딸을 품에 안은 그 감격은 정말 평생 잊을 수가 없어요.”
네, 미국에 정착한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아프리카 라이베리아 출신 난민으로 몬태나주 헬레나시의 시장으로 당선된 윌모트 콜린스 씨의 첫 번째 이야기와 함께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윌모트 씨의 미국 정착 과정과 함께 시장이 되기까지 걸어온 길을 들어보려고 하는데요.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김현숙이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