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는 난민들의 이야기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미 서북부 몬태나주 헬레나시의 시장으로 뽑힌 윌모트 콜린스 씨의 두번째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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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7일 열린 미국의 지방선거에서 화제가 된 당선인이 있습니다. 바로 미 서북부 몬태나주의 작은 도시 헬레나시의 시장으로 뽑힌 윌모트 콜린스 씨인데요. 서아프리카 라이베리아 출신 난민으로 미국에 정착해 시장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1989년 라이베리아에서 내전이 발생하자 윌모트 씨는 아내와 함께 가나로 탈출하게 됩니다. 고등학교 때 교환학생으로 미국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는 아내는 1991년,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올 수 있었지만, 윌모트 씨는 난민 지위를 신청한 후 2년 7개월을 더 기다린 후에야 미국에 올 수 있었습니다.
[녹취: 윌모트 콜린스] “아내가 미국에 가기 2주 전에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됐어요. 고민하다가 결국 아내는 임신한 몸으로 홀로 미국에 갔죠. 그래도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우등 졸업을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까지 미국에 갈 수 없었습니다. 미국에 왔을 때 딸은 벌써 2살이었습니다.”
1994년 2월, 몬태나주 헬레나시에 도착한 윌모트 씨는 아내와 이미 2살이 된 딸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출신 난민이 미국에 정착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녹취: 윌모트 콜린스] “미국에 적응하느라 고생을 좀 했습니다. 라이베리아의 평균 기온은 26도이지만, 여기 몬태나주는 평균 4도거든요. 거기다 제가 2월에 왔잖아요. 영하의 추위를 견뎌내는 게 정말 힘들었습니다. 특히 저는 미국에 온 지 2주 만에 바로 일하기 시작했거든요. 일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 후에 눈이 너무 많이 오는 거예요. 저는 눈이 오니까 당연히 일을 안 갔는데 회사에서 전화를 했더라고요. 왜 출근을 안 하냐고요. 저는 눈이 와서 못 간다고 했죠. 그랬더니 얼마나 어이가 없어 하던지… 그 일을 계기로 눈이 오는 날도 일을 가는 거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유난히도 눈이 많은 몬태나주에서 윌모트 씨는 추위와 싸우며 다른 문화와 언어에 적응해 나가게 되는데요. 주위의 따뜻한 도움의 손길 덕에 미국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외롭지만은 않았다고 합니다.
[녹취: 윌모트 콜린스] “지역사회의 도움이 정말 컸습니다. 저희에게 넘치는 사랑을 줬죠. 물론 모두가 우리를 반기는 건 아니었습니다. 어디를 가든 인종 주의자들이 있으니까요. 우리 마을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어요. 몬태나주엔 흑인이 별로 없고 백인이 주를 이루거든요. 백인 우월주의자들도 있었죠. 한번은 그들이 우리 집의 벽을 허물기도 했어요. 그리곤 우리 보고 아프리카로 돌아가라고 말하기도 했고요. 저는 당시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좋은 이웃들을 가족처럼 여기고, ‘여기가 우리 집이다, 돌아갈 곳이 없다’라고 생각하며 살았죠.”
20여년의 시간이 흘러 헬레나시는 정말 윌모트 씨의 고향이 됐고, 윌모트 씨는 시장에까지 오르게 됐는데요. 힘든 이민 생활 가운데서도 특히 힘이 됐던 곳이 바로 교회였다고 합니다.
[녹취: 언약연합감리교회]
언약연합감리교회의 일요 예배 시간. 백인이 주를 이루는 교회 성도들 가운데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 바로 윌모트 씨입니다.
[녹취: 윌모트 콜린스] “작은 교회라서요. 맡은 일이 많습니다. 성가대에서 노래도 하고, 헌금 걷는 봉사도 하고, 집사도 하고, 여러 모양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윌모트씨는 이런 봉사가 삶의 일부인 듯 무척 자연스러워 보였는데요. 윌모트씨 기독교 신앙의 뿌리는 고향 라이베리아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녹취: 윌모트 콜린스] “저는 라이베리아에 있을 때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가톨릭교회가 운영하는 학교를 계속 다녔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대학생 때 할머니가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할머니는 “우리 집안에서 나 혼자 개신교 종파인 감리교 교인인데 내가 죽으면 나의 이 신앙을 이어갈 사람이 없다. 너가 나를 위해 개신교로 옮기는 게 어떻겠니?”라고 물으시는 거예요. 저는 어차피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생각에 그때부터 감리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다니는 이 언약감리교회는 저희 아내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부터 다닌 교회예요.”
한 교회에 20여 년간 출석하며 꾸준히 봉사해 오듯, 윌모트 씨는 무슨 일을 하든 이렇게 꾸준히 또 최선을 다한다고 하는데요. 이런 성격과 신념이 바로 성공의 비결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녹취: 윌모트 콜린스] “저는 제 아이들에게 매일 말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헌신하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보상이 있다고요. 저도 왜 힘들 때가 없었겠어요? 난민으로 미국에 왔죠, 너무 낯설었죠, 거기다 나만 바라보는 가족까지 딸려 있었죠... 제가 가진 부담은 말도 못 했습니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 생활 초창기엔 청소년을 위한 상담사 일을 하면서 동시에 초등학교에서 청소부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혀 개의치 않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청소부로 일하다 보니 아이들을 가르치는 보조 교사일을 할 기회가 생기더라고요.”
고향 라이베리아에서 교사였던 콜린스 씨는 미국에서도 교사라는 원래의 꿈을 되찾기에 이르렀는데요. 이후 더 큰 도전을 하게 됩니다.
[녹취: 윌모트 콜린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좋아졌습니다. 어느샌가 안정된 직장도 갖게 됐죠. 하지만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미 해군에 지원했고요. 전역한 이후엔 군 의료 시설인 보훈병원에서 사무직으로 10년을 일했습니다. 이후엔 이민국에서도 일했고요. 저는 이렇게 다양한 제 경험들을 지역사회를 위해 쓰고 싶었습니다. 우리 지역 사회를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죠. 그래서 시보다 작은 단위인 카운티 의회와 헬레나시 의원을 거쳐 시장에까지 도전하게 됐습니다.”
그때그때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했더니 어느샌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사람들이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 돼 있었다는 윌모트 씨. 20여 년 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누군가가 윌모트 씨에게 헬레나 시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면, 과연 어떤 반응이었을까요?
[녹취: 윌모트 콜린스] “아마 큰 소리로 웃었을 겁니다. 내전으로 총성이 오가는 라이베리아를 떠나 미국으로 올 때 제가 바랐던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내 인생에 또 한 번의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이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정말 제게 또 다른 기회를 줬어요. 미국에 와서 공부도 했고, 직업도 생겼고, 미국 시민이 됐고, 미군에서 복무도 했죠. 저뿐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도 기회를 줬습니다. 제 아내 역시 대학 졸업 후 군대 간호병으로 복무했으니까요. 저는 제가 미국에서 받은 것들을 지역 사회에 절반만이라도 돌려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꿈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미국에 정착한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아프리카 라이베리아 출신 난민으로 몬태나주 헬레나시의 시장으로 당선된 윌모트 콜린스 씨의 두 번째 이야기와 함께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또 다른 난민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하는데요.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김현숙이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