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종전을 위해선 당사국의 정의를 비롯해 매우 복잡한 법적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패트릭 노튼 전 국무부 법률자문관이 지적했습니다. 과거 미 행정부에서 한국전 종전과 평화협정 체결에 대비한 기밀 보고서를 작성했던 노튼 전 자문관은 그러나 당사국들은 각자의 이해를 반영한 추가 합의문을 통해 법적 요건을 뛰어넘는 정치적 타결을 추진할 수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김영남 기자가 인터뷰했습니다.
기자) 레이건, 클린턴 행정부에 한국전쟁 종전의 법적 요건을 자문하셨습니다. 미국과 남북한, 중국이 참여하는 다자 체제가 돼야 한다고 조언하셨는데 근거를 설명해 주시죠.
노튼 전 자문관) 한국전쟁의 경우 참전국의 정의가 꽤 까다롭습니다. 일반적인 전쟁의 경우 두 국가가 합의를 통해 평화 체제를 회복합니다. 한국전쟁은 남북한 간의 내전으로 시작됐습니다. 북한이 한국을 침략하자 유엔 안보리는 유엔 회원국들이 미국과 함께 한국을 도울 것을 요구했죠. 유엔 안보리는 결의를 통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고 약 20개 국가가 미국 지휘 하에 참전했습니다. 당시 이런 결의는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통과됐는데 소련은 이후 회의에서 모든 사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문제가 복잡하게 됐죠. 중국도 참전을 했지만 확전을 우려해 “중국인민지원군”, 즉 일반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지만 미국과 유엔 역시 중국과의 확전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민지원군이 정전협정의 당사국이 됐죠. 평화 협정 체결 시 누가 당사국이 돼야 할지 애매한 상황인 된 겁니다.
기자) 그렇다면 유엔 차원의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십니까?
노튼 전 자문관) 유엔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부터는 이 문제에 거리를 둬 왔습니다. 유엔 총회는 여러 차례 결의를 통해 유엔 사령부 소속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국가들이 유엔 소속이 아니라 개별 국가로서 1954년 열린 제네바 회의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모든 참전국이 회의에 참여했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죠. 유엔이 만약 평화 협정 초안 작업에 참여했다면 더욱 어려웠을 것이라고 봅니다. 핵심 당사국들만 참여하는 게 더욱 간단합니다.
기자) 종전선언 체결을 위해서는 전쟁의 책임 규명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북한과 중국은 남침을 인정하지 않는데요?
노튼 전 자문관) 협정의 주된 목적은 전쟁을 끝내는 겁니다. 다른 조건들은 부수적이죠.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베르사유 조약에서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의 책임을 명확히 하는 것을 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큰 실수라고 생각했지만 말이죠. 한국전쟁의 경우에도 그렇게 할 수는 있지만 불필요하다고 봅니다. 현재 핵심 당사국들과 이에 대한 이견이 있기 때문에 문제를 복잡하게 할 겁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절차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기자) 한국군 포로와 미군 유해 송환도 종전선언의 조건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십니까? 또한 일각에서는 북한의 핵 신고에 대한 종전 선언이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한 법적 근거가 있습니까?
노튼 전 자문관) 포로 송환은 법적으로 요구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일부 당사국이 이 문제에 크게 관심을 보일 수는 있겠죠. 유해 송환의 경우 종전선언 조건에 추가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합의문이 하나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핵심 당사국인 미국과 중국, 남북한 네 나라가 참여하는 하나의 합의는 당연히 필요하지만 이후 다른 여러 개별적인 합의가 추가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핵 신고를 포함하는 것 역시 법적 요건이 아닌 정치적 요구입니다.
기자) 그렇다면 법적으로 필요한 조건이 무엇이 있습니까?
노튼 전 자문관) 정전협정에서 합의된 기술적인 문제들이 있습니다. 정전협정을 보면 국경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대해 광범위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비무장지대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남북간 각종 경계선은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육로뿐만 아니라 해상과 상공의 경계선은 어떻게 설정할지 등의 문제죠. 저는 남북한이 이런 합의를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북한이 종전이라고 선언해놓고 국경 등 문제에는 동의한 게 없다고 주장하면 안 되겠죠. 이는 제대로 다뤄야 하는 문제입니다.
기자) 그런데 왜 이런 연구를 90년대에 하신 겁니까?
노튼 전 자문관) 1986년 레이건 행정부 당시 이와 관련한 예비 대화가 비밀리에 이뤄졌습니다. 레이건 행정부는 북한과의 평화 협정 체결을 준비했습니다. 당시 폴 울프위츠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종전협정 체결은 매우 복잡한 문제라며 논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법적 논란을 미리 확인하라고 지시했습니다. 1986년 당시 저는 국무부 동아태 부서의 법률 자문을 담당했기 때문에 이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보고서는 기밀이었습니다.
기자) 보고서가 공개된 것은 클린턴 행정부인 1997년인데요. 레이건 행정부와 클린턴 행정부 모두 북한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준비했던 것입니까?
노튼 전 자문관) 저는 두 행정부 모두 이 문제를 알아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방식이나 혹은 다른 방식 중 어떤 것을 택해야겠다고 확정하는 단계까지는 가지 못했습니다. 1990년대에는 미-중-남-북이 참여하는 4자 회담이 진행됐고 2000년대에는 6자 회담으로 이어지기도 했죠. 1997년 당시 국무부에서는 4자 회담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이런 내용의 보고서가 공론화되는 게 좋겠다고 말해 이 때 외부에 공개하게 됐습니다.
과거 미 행정부에서 한국전 종전과 평화협정 체결 기밀 보고서를 작성한 패트릭 노튼 전 국무부 법률자문관으로부터 평화체제 정착을 위한 법적 요건과 한계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대담에 김영남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