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금요일 북한 관련 화제성 소식을 전해 드리는 `뉴스 풍경'입니다. 구한말 일본제국이 5 달러에 사들였던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이 지난 5월 복원된 모습으로 문을 열었는데요. 공관 측이 미국 내 탈북자들을 초청해 분단 이전의 역사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장양희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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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은 구한말 미국의 외교관이었던 세스 펠프스의 저택으로 1877년 세워졌습니다.
1889년 2월 조선왕조는 이 건물에 외교공관을 개설했고, 그로부터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기까지 16년 간 이 건물은 활발한 외교 활동의 중심무대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1910년 8월 조선의 국권이 일제로 넘어가면서 이 건물은 일제에 의해 5 달러에 강제매입된 뒤 10 달러에 되팔렸습니다.
건물은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원래의 소유권을 되찾지 못하다가 노조 사무실, 개인주택 등으로 용도를 바꿔가며 존속해 왔습니다.
한 세기 넘게 잊혀졌던 공사관의 존재는 1990년대 들어 미주 한인사회에 의해 재조명됐고 한국 정부는 지난 2012년 미국인 소유였던 건물을 매입했습니다.
이후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주도로 실측조사와 국내외 관련 문헌, 사진 자료 등을 바탕으로 한 보수, 복원 작업이 진행됐고 올해 3월 개관해 한-미 동맹과 한국 문화유산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공간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워싱턴 시내 백악관 북동쪽 로건서클에 위치한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에 지난 8일 10명의 탈북민이 모였습니다.
[녹취:한종수 박사] “1910년 한-일 강제병합 때 일본 공사가 와서, 5 달러에 강탈한... 1891년에 매입할 때는 2만 5천에 샀는데 시세만 따져도 4-5만 달러인데. 돈의 흐름을 봤을때는 1만 달러 주고 산 거 같아요…”
공사관 측 초청으로 참석한 탈북민과 가족들은 객당, 식당, 정당, 집무실과 침실, 도서실 등 공사관의 1층에서 3층까지 역사학자 한종수 박사의 설명을 들으며 꼼꼼이 살펴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100여 년 전 굵직했던 사건과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탈북자들의 모습은 화기애애 했습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객당에는 벽난로와 소파, 거울과 커튼 등 당시 유행했던 빅토리안 양식의 가구들과 물품들로 채워져 귀빈대접을 위한 공간에 걸맞는 품위가 돋보였는데요, 한 박사는 물품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놓습니다.
[녹취: 한종수 박사] ”보시면, 여기 거울이 그대로.. 그대로 남아 있었죠. (탈북민: 그 사람들도 사용하면서..) 그 당시에 그대로 제작해서, 가구들도 다 똑같지 않지만, 1890년대 가구들입니다. 그 당시 대통령 영부인도 왔다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의 자주외교를 위해서..활발하게……사진 자유롭게 찍으셔도 됩니다.”
‘객당’을 지나 ‘식당’, 그리고 임금에게 예를 올렸던 ‘정당’을 둘러보던 탈북민들. 북한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녹취: 한종수 박사] “한 달에 1일과 두 차례..궁궐을 향해 절을 했어요.,(탈북민: 북한이랑 비슷하네) 아니 왜냐하면 국왕이란 건 하늘의 태양이잖아요. 교체가 가능하지 않잖아요. 유교사회가 그렇잖아요. (탈북민:우리는 선물 좋은 거 맛있는 거 있으면 대원수님 감사합니다)”
2층에 위치한 ‘집무실’에서는 공문서 사본을 두고 대화가 오갔는데요, 미국과 본국의 문서 교환이 배편으로 이뤄졌다는 말에 탈북민들은 기간을 물었고, 한 박사는 편도로 2개월 반이 걸린다고 답했습니다.
집무실 옆에 공사관 부부의 침실로 들어서면서 탈북민들은 여유롭게 대화를 주고 받는데요, 19세기 조선 사람들이 서구문명에서 겪는 문화적 충격에 대한 대화가 흥미롭게 이어집니다.
[녹취: 현장음] “(탈북민: 샤워는 여기서 처음해 보지 않았을까요? ). ‘신체발부수지부모’해서, 마음대로 씻지 않잖아요. (변기는 처음 사용했을 거 같은데요). 그랬을 가능성이 큽니다. 거기다 세수하거나 그러지 않았을까요? 문화적인 충격들이.. 미국 신문기사에 많아요. 관복 입고 갔는데, 서커스단인줄 알고, 아이들이 돌 던지고 그랬다는 기사가 있어요.”
진지한 대화도 오갑니다. 당시 공사의 임기를 묻는 탈북민의 질문에 한 박사는 외세의 압박에 조선은 신음했지만 자주권을 지키려던 선조들의 숨은 노력을 강조했습니다.
[녹취: 현장음] "(공사는 임기가 몇년 이었어요? ) 따로 없었어요. 시대에 따라. 초대 박정양은 10개월 만에.소환돼서 갔습니다. 중국의 압력 때문에, 처음에 중국이 파견을 막았거든요. 수 천 년 동안 이제까지 너희가 중국을 종속국이었으면서 자주국인양, 공사를 파견하면 안된다고. 나중에 고종이 결단을 해서 딜을 합니다. 3가지 약속을 하고 떠났는데, '중국 공사관에 들려서 먼저 보고하겠다. 클리브랜드 대통령 만나는데 같이 가겠다. 모든 미국과의 관계 협상은 청나라 공사의 허락을 듣고 체결하겠다' 약속하고 떠났는데, 오자마자 대통령을 만났거든요.”
미-한 외교 수립 과정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전시관인 3층.
탈북민들은 1882년 조미수교통상조약으로 미-한 외교관계가 수립되고 이듬해 첫 외교사절인 보빙사가 미국에 오는 것을 시작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두 나라 외교관계의 출발과 과정 등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 시간가량의 견학이 마무리될 즈음 탈북민 남성이 질문을 던집니다. 외세의 압력으로 자주권을 다시 빼앗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한 박사는 역사학자 답게 초대공사 박정양의 일기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녹취: 현장음] “열강을 대비하려면 군사훈련을 하게 해서. 군비를 강화하고 국방력을 강화해야 하죠. 돈이 있어야죠. 당시 미 의회에 행정부에 차관을 도입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해요. 그 당시 200만불 도입하서 승락 받았는데 의회에서 부결됐어요.”
북한 사람으로서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의 존재와 역사에 대해 새롭게 알게된 탈북민들은 이번 방문이 매우 의미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에서 교사로 일했던 익명을 요구한 30대 탈북 여성입니다.
[녹취: 30대 탈북 여성] “저는 역사에 대해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100년 전까지도 사실은 70년 전까지만도 같은 나라였잖아요. 북한과 남한 통틀어 같은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이 저한테는 감명 깊었던 거 같아요. 생각을 해보니까, 우리는 언제든지 합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역시 익명을 요구한 탈북 남성은 북한 주민은 조선 말기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30대 탈북 남성] "고구려가 강대국이었고 하니까, 배웠지만 조선 말기 역사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무한 거죠.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라를 팔아 먹었다는 거죠. 북한은 그 교훈에 의해 자주적으로 세워지고. 나라를 망하게 한 정권을 무시하고, 무능하게 취급하는 거죠. 그런데 뿌리를 알게되고, 원인도 알게 되고 배웠어요.”
이 남성은 초대공사 박정양과 당시 고종이 열강의 압박 속에 자주적 행보를 벌였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북한 사람으로서 한국 사람과 뿌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는 시간이었다는 느낌도 전했습니다.
[녹취: 30대 탈북 남성] “저희는 정말 북한은 다른 모든 역사나 모든 면에서 항상 독특한 나라라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저희 인식 속에서도 저희 모든 역사를 해방이 된 이후로부터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사실은 조금 더 밑으로가서 우리 민족의 뿌리가 있구나 알게 됐고.. 뿌리라고 할 때는 남과 북을 다 통합하는 거니까. 우리 모두가 다 민족의 하나로 알아야 할 부분이고, 조금더 역사에 대한 시각이 넓어 진거 같아요.”
30대 여성 샤론 김 씨는 북한에서 상해임시정부에 대해서는 배웠지만, 미국에 공사관과 공사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 정권이 싫어서 탈북한 사람으로서 한반도 땅을 다시 볼 기회였다고 말했습니다.
샤론 씨는 남북한이 이념 때문에 분단된 이전의 이야기여서 있는 그대로 편한 마음으로 들었다는 점도 언급했습니다.
탈북 여성의 딸로 초등학교 2학년 제시카 양은 공관 견학을 마치고 방명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It’s nice that the history takes place on to the house” 역사가 이 집에서 살아있다는 것이 멋지네요.” 라는 내용입니다.
이날 행사를 진행한 한종수 박사는 조선의 역사는 한민족이 공유하는 것이라며 관심을 당부했습니다.
뉴스 장양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