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꾼 소리의 창조자, 레이 찰스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레이 찰스가 컨트리와 웨스턴을 조화한 음반을 내려고 하자 음반 업계 전문가들은 팬을 잃을 수 있다, 그런 종류의 음악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려와는 달리 노래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칸추리와 웨스턴 음악의 현대적 소리(Modern Sounds in Country and Western Music)’라는 제목으로 낸 음반의 곡들을 사람들은 대단히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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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반에 들어 있는 곡 중 하나가 바로 대히트를 기록했던 ‘그대 향한 사랑 멈출 수 없어(I Can't Stop Loving You)’였습니다. 이 곡은 칸추리와 웨스턴을 합한 것이지만 그 안에는 레이 찰스만의 독특한 흑인 교회 음악과 블루스의 색채가 들어가 있습니다.
레이 찰스는 이제 본격적으로 그만의 개성이 있는 곡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흑인 교회 음악과 블루스, 로큰롤을 합친, 누구도 시도해 보지 못한 그만의 노래가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레이 찰스로서도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그 중 하나가 ‘Let's Go Get Stoned’ 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받아주지 않거든, 친구를 불러 술이나 한잔하라’는 내용의 가사입니다. 이런 유형의 노래는 너무 인기가 좋아 1950년대에 수백만 장씩 팔렸습니다.
레이 찰스는 재즈도 녹음했습니다. 그것 역시 잘 팔렸습니다. 음악 평론가들은 그의 재즈가 새롭고 신명 나는 것들이라고 평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Sweet Sixteen Bars’로 재즈에다 블루스 색채를 가미한 것이었습니다.
레이 찰스는 1년이면 약 반은 악단과 함께 여러 곳을 돌며 연주를 하고 나머지 반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녹음 스튜디오에서 작곡과 음반 제작에 몰두했습니다. 공연 때 부를 모든 노래는 그가 직접 편곡했고 보통 막이 오르기 5분 전에 연주할 곡을 직접 선정했습니다.
공연 때 많이 부른 노래 중 하나, ‘Unchain My Heart’는 R&B와 팝의 요소를 섞은 것으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직역하면 ‘내 마음의 사슬을 풀어 줘요’라는 뜻인데, 상대방의 사랑이 식어서 애타는 심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곡은 R&B 차트에서는 1위, 팝 싱글 차트에서는 9위에 올랐습니다.
레이 찰스는 시력을 잃었지만 그것 때문에 전혀 비관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어서 눈 안 보이는 것 때문에 좌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뉴스를 들으면 정말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다”고 말했습니다.
찰스는 또 언젠가 “앞을 못 보는 것은 내게는 장애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귀는 나에게 기회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또 만약 청력을 잃는다면 나의 생명은 끝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레이 찰스가 청각 장애자를 위한 로빈슨 기금을 설립하고 지원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듣는 데 중요성을 두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레이 찰스는 또 언제나 그의 성공이 모두 어머니의 덕택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앞을 못 본다는 것이 머리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하라’고 거듭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레이 찰스는 수상 경력도 화려했습니다. 음반 분야에서 그래미상을 17번이나 받았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는 맨 먼저 헌정된 가수 그룹에 들었습니다. 여러 대학, 미국과 프랑스 정부도 학위와 영예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특히 조지아주 애틀란타에 있는 무어하우스 대학에서는 예술공연 분야의 평생 성취상인 ‘캔들어워드’를 수여하고, 연이어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레이 찰스가 태어난 조지아주는 그의 노래 ‘내 마음 속의 조지아 (Georgia on My Mind)’를 아예 주의 공식 노래로 지정했습니다.
레이 찰스는 특정 정당의 전당대회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아름다운 아메리카’(America the Beautiful)를 불렀습니다. 여러 음악 전문가들은 그때의 공연 녹음이 수많은 녹음 중 최고의 작품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레이 찰스에게도 시련기는 있었습니다. 1965년에는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됐고 병원에 입원까지 해가며 중독을 치료했습니다. 결혼도 두 번 했지만 모두 이혼으로 끝났습니다. 정식 결혼 외에도 그는 여러 여성과의 사이에서 모두 12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2004년에는 레이 찰스의 생애를 다룬 영화 ‘RAY’가 만들어졌습니다. 테일러 핵포드가 제작 감독한 이 영화는 주인공으로 나온 제이미 팍스가 아카데미는 물론 골든글로브, 미국배우조합상(SAG) 등 주요 시상식에서 남우 주연상을 받은 우수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레이 찰스는 예정됐던 시사회 참석을 몇 달 앞두고 6월 10일, 간 질환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친구들과 음악계 동료들로부터 늘 Brother Ray, 즉 레이 형, 또는 The Genius 즉 천재로 불렸던 레이 찰스는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었던 여러 장르의 음악을 조화시키고 73년의 생애를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