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2차 대전의 영웅, 오디 머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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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영화배우 오디 머피는 2차 세계대전 중 어떤 사람보다 많은 훈장과 메달을 받은 참전용사입니다. 미국에서는 그를 가장 높이 서훈된 군인이라는 뜻으로 'The Most Decorated Combat Soldier'로 부르고 있습니다.
오디 리언 머피는 1924년 6월 20일 텍사스주 킹스턴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소작농의 자녀 12명 중 6번째였습니다. 가정을 돌보기 힘들어했던 아버지는 머피가 12살 때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머피는 그 후 아버지를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머피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목화 따는 일을 하면서 집안 살림을 도왔습니다. 하루 일당이 당시 1달러, 요즈음 가치로는 18달러 정도였습니다.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 때문에 12명 아이들 중 3명은 일찍 사망했습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해 머피의 다른 세 동생은 고아원으로 보내졌습니다. 머피가 16살 때는 어머니가 사망했습니다. 머피는 백화점, 주차장, 주유소, 학교 등의 노동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미국은 전쟁을 선포하고 징집을 시작했습니다. 오디 머피도 군에 입대하기 위해 지원서를 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모자라 입대가 거부됐습니다. 군 입대 최저 연령은 16세. 머피의 나이는 15세였습니다.
머피는 1942년 만 16세가 되자 해병대에 지원서를 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영양실조 판정으로 실격이 됐습니다. 당시 그의 체격은 키 166cm에 몸무게는 48kg밖에 안됐습니다. 머피는 해군과 공수부대에도 지원했으나 역시 불합격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육군 모병소에 가서 사정 사정해 겨우 입대를 하게 됐습니다.
텍사스주에 있는 신병 훈련소에 들어간 머피는 약한 체력에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교관들은 머피를 행정병이나 취사병으로 교육해 후방으로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머피는 꼭 전투병으로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교관들은 별수 없이 그를 전투병으로 훈련시켰습니다.
훈련을 마친 에디 머피는 2등병으로 미 육군, 제3보병사단 15연대에 배치됐습니다. 부대에서는 아직 어리고 키가 작은 머피를 ‘풋내기’ 또는 ‘텍사스 꼬마’라고 놀렸습니다. 머피가 소속된 부대는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로 파병됐습니다. 이어 이탈리아의 시실리아 상륙작전에 투입됐습니다.
머피의 부대는 1943년 7월 10일 이탈리아군과 교전을 벌였습니다. 이때 머피는 멀리서 말을 타고 달아나던 두 명의 이탈리아 장교를 사살했습니다. 머피의 첫 전과였습니다. 그후 머피는 이탈리아 본토와 프랑스 남부에서 독일군 기관총 포대에 돌진해 수류탄으로 공격하는 등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합니다.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지만 모두 소설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그 같은 전공으로 머피는 이등병에서 승진을 거듭해 소위가 됐습니다.
무엇보다 오디 머피를 유명하게 한 건 1945년 1월 26일 프랑스 홀츠바이어에서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소대장인 머피는 부대를 이끌고 행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전차를 앞세운 수백 명의 독일군의 반격에 부딪혔습니다. 이로 인해 머피 부대의 ‘M10 디스트로이어’ 탱크에 불이 붙었습니다. 머피는 부대원들을 숲속으로 후퇴시키고 자신은 탱크 옆에서 적을 향해 소총을 쏘아댔습니다. 그러나 많은 적병이 몰려오자 그는 불타는 탱크로 뛰어 올라가 기관총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많은 독일군을 사살했지만 머피도 다리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머피는 의무병을 다른 부상병에게 보내고 자신은 혼자서 싸움을 계속했습니다. 머피는 한편 싸우면서 한편 무전으로 야포 지원사격을 요청했습니다. 이때 머피는 50명의 독일군을 사망 또는 부상케 했습니다. 독일군은 결국 후퇴했습니다. 불이 붙은 탱크에 남아 사격을 하던 머피는 독일군이 물러가자 탱크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순간 탱크가 폭발했습니다. 이 전투 후 머피는 중위로 진급했습니다. 머피는 2년 남짓한 참전 기간 중 약 260명의 독일군을 사살하고 많은 포로를 잡았으며 6대의 전차를 파괴했습니다.
머피는 명예 훈장, 육군수훈 십자훈장, 은성 훈장, 동성훈장 등 미국 군인에게 수여되는 모든 훈장과 메달을 받았습니다. 또, 프랑스 정부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 벨기에 무공십자훈장 등 외국의 훈장까지, 그가 받은 훈장과 메달은 모두 33개에 달했습니다.
1945년 독일이 항복한 후 머피는 텍사스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각종 모임에 연사로 초빙됐고 축하연, 퍼레이드, 환영식 등도 열렸습니다. 머피는 1945년 9월 21일 현역에서 제대했습니다. 제대 후 그는 불면증, 우울로 인한 발작, 심한 악몽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기도 했습니다.
머피는 1949년 자서전 'To Hell and Back'을 출판했습니다.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영웅적인 행동들이 스스로 한 것은 아니라고 겸허해 하면서 대부분 부대원들의 용맹과 국가에 대한 헌신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머피가 영화계로 진출한 건 1945년 9월 배우 제임스 캐그니가 그를 할리우드에 초대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머피는 1948년 '영광 너머로'라는 영화에 처음 출연했습니다. 몇 편의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던 머피는 '배드 보이'에서 처음으로 주연이 됐습니다. 차츰 영화인으로서 명성을 쌓아가던 그는 1959년 '총탄에는 이름이 없다'라는 영화로 서부영화에도 등장했습니다. 그 후 머피는 많은 서부 영화에 출연합니다. 약 25년 동안 출연한 44편의 영화 중 33편이 서부영화였습니다.
자서전 'To Hell and Back'은 1955년 영화로 만들어 졌습니다. 한국에서는 ‘지옥의 전선’이라는 타이틀로 이 영화가 소개됐습니다. 이 영화는 거의 1천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대 흥행작이 됐습니다. 이 수치는 그때까지 유니버설 영화사에서 보급한 영화 중 가장 큰 수익이었습니다. 머피는 배우로서 총 3백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습니다. 머피의 이름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정됐습니다.
머피는 성공적인 컨트리 뮤직 작곡가이기도 했습니다. 머피가 작곡한 노래는 딘 마틴이나 에디 아널드 등의 유명 컨트리 가수들에 의해 발표됐습니다.
1971년 5월 28일 머피는 사업 차 5명의 동료들과 개인 전용기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비행기는 버지니아 주 로노크 부근에 있는 산, 브러쉬 마운틴에 추락했습니다. 그리고 조종사를 포함한 6명이 모두 사망했습니다. 머피의 나이 46세였습니다.
1971년 6월 7일 머피는 알링턴 국립 묘지에 안장됐습니다. 머피의 안장식에는 조지 H. W. 부시 당시 유엔 대사, 웨스트모어랜드 장군, 그리고 머피가 속했던 미 제 3사단 요인들이 참석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알링턴 국립묘지의 머피 묘소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묘소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고 있습니다.
머피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기리는 여러 행사나 단체들이 결성됐습니다. 1973년에는 '오디 L. 머피 기념 전역군인 병원'이 텍사스의 샌안토니오에 건립됐습니다. 1996년 텍사스 주의회는 오디 머피의 생일인 6월 20일을 오디 머피의 날로 선포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고속도로도 등장했습니다. 2000년에는 오디 머피의 초상이 우표에 실렸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명명된 중학교도 문을 열었습니다.
오디 머피는 나라가 필요할 때 자진해 총을 들었고, 처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 하고 살다간 사람으로 미국인들의 마음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