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금요일 북한 관련 화제성 소식을 전해 드리는 `뉴스 풍경'입니다. 지난 2015년 북한 당국에 체포돼 2년 7개월 간 억류됐던 한국계 캐나다인 임현수 목사가 당시 상황을 담은 책을 펴냈습니다. 장양희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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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고향인 임현수 목사는 1997년부터 18년 간 북한을 150차례 드나들며 북한 주민들을 위한 대규모 인도주의 지원 사업을 펼쳤습니다.
그러던 중 2015년 1월 라선 지역 방문 중 북한 당국에 전격 체포됐습니다. 죄명은 ‘특대형 국가전복 음모 행위’였습니다.
임 목사는 최근 펴낸 수기에서 당시 체포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김일성 대신 하나님을, 김정일 대신 예수님을 믿고, 당 대신 교회를 세워야 하며, 4만 3천개의 혁명사적관을 교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의를 인터넷에서 듣고 나를 죽이기로 한 것이다.”
임 목사는 북한 내부의 권력다툼이 자신의 선교활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며, “난데없이 이전 강의 내용을 찾아내 죄를 덮어 씌웠다”고 말했습니다.
결정적인 배경이 된 건 임 목사 선교팀이 김일성 동상에 절하지 않기로 한 일이었습니다.
1997년 캐나다내 큰빛교회 선교팀 소속으로 북한을 방문한 임 목사는 당초 김일성의 동상에 절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들어갔습니다.
150여 차례에 걸친 방북 활동에서 이 문제가 걸림돌이 된 적은 없었다는 게 임 목사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당시 임 목사를 도왔던 통일전선부가 내부 권력다툼에서 밀려나는 과정에서 임 목사는 희생양이 됐습니다. 권력을 잡은 세력이 통전부 관계자들을 숙청할 명분을 찾던 중, 최고 존엄에 절하지 않은 임 목사를 봐 줬던 것을 문제 삼은 겁니다.
임 목사가 전격 체포된 뒤 붙은 죄목은 최고존엄 모독죄, 특대형 국가전복 음모죄, 반동분자(탈북자)를 도운 죄 등이었습니다.
임 목사는 조사를 받고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일과 연루된 사람에 해를 끼칠까 염려돼 북한 당국의 지시에 따랐지만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책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나는 재판 날을 잊을 수 없다. 변론하는 시간에 내 변호사라는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느닷없이 나를 야단쳤다. 그는 자기 생각이나 의지, 나를 변호할 만한 힘이 없어 보였다. 그 후 등장한 증인은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말도 안되는 증언을 했다. 나는 침묵하고 말했다. 그러자 곧이어 사형을 언도했다.”
임 목사는 VOA에 당시 심경을 밝혔습니다.
[녹취: 임현수 목사] “충격적이었죠. 예상을 했었다면 덜했을 텐데, 상상도 못했었고, 처음에는 조사받고 놔줄 것처럼 유인하더니.. 갑자기 재판을 열고, 재판을 열고 과정을 끌려가면서 몇 개월 살아야 하나. 했는데, 사형선고를 했는데 기가 막히고, 공산주의는 우리를 계급적 원수를 혁명의 이름으로 처단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그 당시 심경을 말로 하기 힘들죠. 그러다가 다시 자기들끼리 들어가더니 종신형을 내리는 거에요.”
임 목사는 북한 인권 문제가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던 상황에서 사형이 종신형으로 바뀐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지난 7월 중순 출간된 임현수 목사의 수기 “사망의 골짜기를 주님과 함께 통과한 자의 고백-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오.”
300쪽 분량의 이 책은 억류 이전의 선교, 북한에서의 삶, 석방, 그 이후의 이야기, 북한 선교의 현재와 미래로 나뉘어 전개되며, 80여개의 일화들은 인물과 사건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임 목사는 석방 후 시작한 순회사역을 소화하느라 비행기 안에서 책을 썼고, 지난해 9월 출간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그러나 책 출간으로 임 목사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지인들의 염려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다가 지난 7월 출간을 결심했습니다.
[녹취: 임현수 목사] “한국사회가 북한을 모르고 정치하는 사람들도 피상적이고 낙관적인 기대를 하기 때문에 북한에 대해 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들이 하도 궁금해 하니까, 있는 사실을 이야기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어디나 다 이야기할 시간도 없고, 책을 쓰면, 책을 통해서 궁금했던 것을 해결하지 않을까.. 하는 동기 또 하나는 북한의 실상을 알려야겠다. ..”
독방생활에서 경험한 신앙 간증도 책 출간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임 목사,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들이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해 바른 세계관을 갖고 형편에 맞는 기도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임 목사는 자신과 선교팀이 북한 주민들과 탈북민, 심지어 유엔 북한대표부 사람들을 도운 사례들을 통해 북한 내부 상황을 소개했습니다.
홍게 잡이, 항주 국수공장, 대동강 즉석국수 공장, 그리고 고아 1만 350명 구제, 이불, 안경 80만개 지원, 블루베리 사업, 영어 교원 1천500명 양성 등 북한 주민의 식량안보와 교육에 힘쓴 18년 간의 활동입니다.
이 중 북한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오랫동안 최선을 다했다고 적었습니다.
“북한의 고아들이 꼭 예수님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다, 예수님이 고아의 모습으로 내게 찾아오신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사랑하게 됐다”라는 대목은 임 목사의 열정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북한 당국에 체포된 후 임 목사 자신이 북한 주민들 보다 열악한 상황에 놓이게 됐습니다.
석방 직후 체중이 크게 줄어든 임 목사의 모습은 억류 생활을 짐작하게 했습니다.
독방에서 식사는 지급됐지만 영양실조를 면하지 못했고, 고된 노동과 간수들의 언어폭력은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임 목사는 당시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적었는데요, 한 달 넘게 이어진 조사 과정에서 겪은 일이 그 중 하나입니다.
[녹취: 임현수 목사] “가혹행위.. 예민할 때라 (북한도)약점 잡히지 않으려고 조심했는데, 언어 폭력이 폭력인줄 모르고.. 안기부, 국정원에서 나온 거 아니냐. 진술서를 쓰라고 수도 없이 반복하니까. 한 달 동안 이어졌고,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십이지장을 잘라야 할 정도로. 정신적인 고문에 시달렸죠.”
그러나 천일 가까운 기간 동안 석방에 대한 염려나 우울했던 적은 없었다고 말하는 임현수 목사.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루’단위로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녹취: 임현수 목사] “첫 날 저녁부터 꿈으로 보여주시고 위로해 주셨기 때문에,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했고, 일일 단위로 살았어요. 그래서 극복할 수 있었고, 내일 것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
기독교 목회자로서 북한 주민을 향한 선교를 목적으로 북한에 들어간 임 목사는 억류 기간 중에도 선교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도 만났습니다.
[녹취: 임현수 목사] “간호한다는 명목으로 온 간수가 있어요. 우간다에 다녀온 사람인데, 저한테 잘 해줬고. 그 분도 걱정하지 말라 했죠. 의형제로 형님 동생으로 지낼 정도.. 그 분이 제가 감옥에서 나오기 전에, 소식을 전해 주는데 사람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 분과의 생활했던 것이 제일 좋은 기억으로..”
임 목사는 특별히 탈북민에 대한 경험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자유는 주어졌지만 불안함과 우울증, 가족에 대한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들이라며, 탈북민 모자가 굶어 죽는 사건이 생기고 청년이 자살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임 목사는 석방 후 한국과 북미주 지역을 돌며 쉬지 않고 강연회를 열고 있습니다.
지난달에는 워싱턴주에서 그리고 이번주는 하와이에서 미전도 종족 선교를 주제로 강연했습니다.
북한 역시 미전도 종족으로 선교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선교 활동을 쉬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녹취: 임현수 목사] “지금 북한은 공산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고, 제가 경험한 북한은 70년 동안. 질이 좋지 않은 종교집단으로 전락했습니다.”
VOA 뉴스 장양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