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에 1만6천 개가 넘는 영업장을 가진 피자 연쇄망 ‘도미노스 피자(Domino’s Pizza)’. 세계 7위의 패스트푸드 식당 프랜차이스입니다. 피자 체인만 치면 피자 허트(Pizza Hut)에 이어 세계 2위입니다. 전 세계 종업원 수가 30만 명이 넘는 도미노 피자는 최근 1년 매상고가 24억 7천만 달러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 거대 기업을 창업한 인물은 토마스 모나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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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모나한은 1937년 미국 중서부 미시간주 앤아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은 불우했습니다. 불과 4살 때 트럭 운전사이던 아버지가 크리스마스이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 갈 길이 막막했던 어머니는 토마스와 그의 동생 제임스를 가톨릭 보육원, 성 요셉 어린이의 집에 맡겨야 했습니다. 이곳에서 톰 나한은 거칠었습니다. 걸핏하면 친구들과 싸웠고, 학교에서 퇴학까지 당했습니다.
그때 톰을 따뜻하게 보살펴준 수녀가 있었습니다. 펠리시안 수도회의 베라다 수녀였습니다. 톰은 베라다 수녀의 사랑으로 차츰 성실한 아이로 변해갔습니다. 톰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됐을 뿐 아니라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베개를 던지며 싸움을 하는 등 잦은 학칙 위반으로 결국 신부는 되지 못했지만 그의 신앙은 돈독했습니다.
톰과 제임스는 헤어진 지 7년 만에 간호사가 된 어머니와 다시 합쳐 살게 됐습니다. 톰 모나한은 1956년 미 해병대에 입대했습니다. 제대 후에는 미시간주 앤아버로 돌아와 미시간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모나한은 건축학과에 들어갔으나 학비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모나한은 동생과 함께 입시란티라는 곳에 있는 비좁고 초라한 피자 가게를 샀습니다. 학비를 벌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가게 이름은 ‘도미닉스’(DomiNick’s)였습니다. 가게 값은 현찰 500달러에 나머지 400달러는 후불, 총 900달러였습니다.
이들 형제는 사실 피자 식당을 평생의 사업으로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동생 짐은 우체국에 계속 다니고 싶어 했고, 톰은 미시간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려고 했습니다. 짐은 결국 형과의 동업에서 손을 뗐습니다. 혼자 남게 되자 톰은 세계에서 최고의 맛을 내는 피자를 만들겠다는 각오를 갖고 사업에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고의 피자 양념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집중 연구했고, 밀가루와 치즈도는 최상급을 사용했습니다. 톰은 피자 배달 시스템을 도입하고 새로운 피자 상자도 개발했습니다. 다른 식당들이 하는 것처럼 그냥 마분지 상자가 아니라 여러 개씩 포개 높이 쌓아도 찌그러들지 않고 배달했을 때도 따뜻함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상자였습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사업이 잘됐습니다. 그런데 식당의 명칭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전 주인이 ‘도미닉스’(DomiNick’s)라는 상호를 더 이상 사용하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대에서 제일 장사가 잘되는 식당으로 소문이 났는데,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영업에 막대한 지장을 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고민하던 그에게 한 배달원이 ‘도미노’라고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모나한은 그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어 즉각 ‘Domino’s Pizza’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모나한은 하루 18시간씩 일하고 300군데가 넘는 다른 피자 식당을 직접 방문하면서 최고의 기술과 경영 방식을 개발했습니다. 도미노스 피자는 피자 업계에서 단연 앞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모나한은 1967년부터 프랜차이즈 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갔습니다. 도미노스 피자는 본사 직영 매점과 가맹점, 즉 프랜차이스 매점의 두 가지 형태로 확대됐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미노 피자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입실란티의 식당에 불이 나 모든 것이 타버렸는가 하면, 지나친 확장을 하다 막대한 빚을 지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 도미노스 피자 프랜차이스 가맹점은 100군데를 돌파했습니다. 그의 사업은 1980년대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지역 언론은 새로 부상하는 재벌 톰 모나한에 주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이 되자 매일 평균 3개의 도미노스 피자가 새로 문을 열었습니다.
1983년 톰 모나한은 미국 프로 야구단 ‘디트로이트 타이거스(Detroit Tigers)’를 5천300만 달러에 사들였습니다. 이 금액은 프로 스포츠단 거래가의 신기록이었습니다. 운 좋게도 그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최정상인 월드 시리즈 챔피언이 됐습니다.
타이거스의 우승은 톰 모나한의 유명세를 몇 배로 늘려주었고, 그 여파로 피자 사업도 더욱 번창했습니다. 미국 피자 배달 서비스 시장 점유율은 54%까지 치솟고, 해외 100여 개국에 9천 개 이상의 점포를 운영하는 세계 최대 피자배달 회사를 이루었습니다.
재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모나한은 사치가 늘어났습니다. 초호화 자동차, 요트, 헬리콥터 등을 사들이는가 하면 어느 섬을 통째로 사, 그 안에 으리으리한 회사 본부와 개인 저택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늘 무언가 커다란 공허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CS 루이스(Lewis)라는 학자가 쓴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라는 책을 읽게 됐습니다. 모나한은 그 책을 읽고 자신의 프라이드와 그 모든 값비싼 재물을 사들이는 이유가 남에게 과시하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나한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프로 야구단, 초호화 요트, 고급 저택 등을 모두 포기했습니다. 호화 건물 공사 같은 것도 중단했습니다. 1998년에는 도미노스 피자 지분도 10억 달러에 매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인생과 재산은 다른 사람을 돕는 데 바쳤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대학을 세우기로 했다고 모나한은 말합니다.
모나한은 플로리다주 남서부 지역에 광대한 땅을 매입하고 가톨릭계 대학인 아베마리아 대학을 세웠습니다. 아베마리아 대학은 미국 내에서 40년 만에 처음 등장한 가톨릭계 대학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아베마리아 방송국과 초등학교, 중학교도 세웠습니다.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도시를 건설하는 게 꿈이었던 모나한은 2004년 이 대학촌을 혼전 섹스, 피임, 낙태, 포르노 없는 도시로 만들겠다고 선언하자 국제 언론은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며 비판을 가했습니다.
본래 자신이 꿈꾸었던 것과 똑같은 도시를 만들지는 못하게 됐지만 아베마리아 시 내에서 섹스 상점이나 스트립 클럽 같은 영업은 하지 못하도록 하고, 대학 안에서는 피임 기구나 포르노 상품 판매 등은 할 수 없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플로리다주 관리들은 새 도시 개발로 침체해 있던 이 도시에 대행운을 가져다줄 것이라며 환영했습니다. 특히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젭 부시 플로리다 주지사는 새 가톨릭대학 착공식에 직접 참석해, 적극적인 환영의 뜻을 표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을 때 재산을 좋은 데 기부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절차가 있게 마련입니다. 톰 모나한은 바로 그 절차를 실천에 옮기는 데 여생을 보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