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최초의 흑인 연방대법관 서굿 마셜

서굿 마셜 전 연방대법관.

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미국 최초의 흑인 연방 대법관 서굿 마셜에 대해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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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서굿 마셜


서굿 마셜은 미국 최초의 흑인 연방 대법관으로, 인종 차별을 없애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입니다.

마셜은 1908년 미국 동부 볼티모어에서 태어났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한 마셜은 1930년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링컨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는 메릴랜드대학교 법률전문대학원, 즉 Law School에 지원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이 거부됐습니다.

마셜은 대신 워싱턴 D.C.에 있는 하워드대학교 Law School에 들어갔습니다. 하워드 대학교는 흑인들이 많이 다니는 사립 학교입니다. 역시 클래스 1등으로 Law School을 졸업한 마셜은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마셜 변호사는 대부분 흑인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는 사건들을 다루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유능한 변호사로 소문이 났습니다.

서굿 마셜은 미국 최대의 권익 옹호 단체 중 하나인 전국 유색인종 협회, NAACP의 수석 법률 대표가 됐습니다. 그가 다룬 여러 가지 소송은 대법원까지 올라갔습니다. 변호사 생활을 하는 동안 대법원에서 다툼을 벌인 케이스는 30회가 넘는데, 그가 패소한 사건은 한두 건에 불과했습니다.

마셜이 맡았던 가장 중요한 케이스는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소송입니다. 이 소송은 미국 중서부 지역 캔자스주 토피카라는 도시에서 제기된 것으로, 전국적으로 첨예한 관심을 모은 사건이었습니다.

토피카에는 린다 브라운이라는 초등학교 3학년 흑인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린다는 집에서 1천600m밖에 안 떨어진 가까운 학교를 놔두고 멀리 떨어진 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 문제는 가까운 학교가 백인들만 다니는 학교라는데 있었습니다.

린다의 아버지 올리브 브라운은 가까운 섬너 초등학교로 딸의 전학을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교장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전학을 거부했습니다.
캔자스주 법은, 같은 교육을 실시하는 한 흑인 학교와 백인 학교를 따로 두는 것은 합법이라고 돼 있었습니다. 분노한 올리브 브라운이 법의 부당성을 들어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러자 NAACP의 법률 대표이던 서굿 마셜이 소송을 맡게 됐습니다. 이 사실이 보도되자 마셜에게는 여러 차례 살해 위협이 가해졌습니다. 그러나 마셜은 그런 위협에 굴하지 않고 소송을 진행했습니다.

이 소송은 3년에 걸쳐 대법원까지 올라갔습니다. 서굿 마셜은 대법원 심리에서 인종으로 사람을 나누는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 따라서 학교를 인종별로 나누는 캔자스주 법은 위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954년 5월 17일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토피카의 어떤 학교에서도 인종 때문에 학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즉 백인과 유색인종이 같은 공립학교에 다닐 수 없게 하는 캔사스주 법은 불법이라고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전국의 언론은 이 역사적인 재판 결과를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소송에 대한 판결은 그 후 여러 유사한 사건에서 판례가 됐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 판결이 20세기 미국에서 내려진 가장 중요한 대법원 판결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서굿 마셜을 연방 항소법원 판사로 임명했습니다. 그 뒤를 이은 린든 존슨 대통령은 1967년 서굿 마셜을 대법관에 지명했습니다. 1명의 대법원장과 8명의 대법관 중 최초의 아프리카계 대법관이 된 것입니다. 그는 24년 동안 대법관직을 수행했습니다. 마셜 대법관은 사형제 문제가 대두될 때 마다 이를 반대하는 등 주류를 이루는 보수파 대법관들에 반대하는 표결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1991년 83세로 은퇴했습니다. 일부 언론은 그가 더 이상 보수적인 주류 대법관들과 싸우기를 원치 않아서라고 보도했습니다. 은퇴 회견에서 한 기자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 원하느냐고 묻자“내가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 하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마셜 대법관은 1993년 85세로 타계했습니다. 시신이 안치된 대법원에는 단 하루에 전국에서, 1만8천 명이 넘는 조문객들이 찾아와 혁명적인 대법관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서굿 마셜 한 사람이 미국 내 모든 인종 차별을 제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평등을 향한 역사적인 과정에 큰 획을 그은 인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