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78세에 붓을 잡은 국민 화가, 그랜마 모세스에 대해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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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78세에 그림 그리기를 시작해 미국의 국민 화가로 추앙을 받게 된 그랜마 모세스(Grandma Moses)의 본래 이름은 아나마리 로벗슨 모세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할머니라는 말을 붙여 그랜마 모세스라는 애칭으로 불렀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나이에 처음 붓을 들어 그림을 시작한 그녀는 미국 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서 사랑을 받는 많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나이를 극복하고 새 삶을 개척한 예로도 잘 알려져 있는 그랜마 모세스는 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한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10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600점의 그림을 세상에 남겼습니다.
그랜마 모세스의 그림들은 그리운 고향을 연상하는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림 속에는 따뜻하고 정겨운 이야기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랜마 모세스의 그림은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어머니 날 등에 미국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자주 사용이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림엽서, 카드, 각종 천, 도자기 등에 표현이 됐고, 심지어 커피, 립스틱, 담배, 카메라 등의 다자인에도 사용됐습니다.
미국 우정국은 그랜마 모세스의 그림 우표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1950년 미국 언론 단체인 National Press Club은 미국에서 가장 주목 받는 여성 5명 가운데 한명으로 그랜마 모세스를 꼽았고, 시사 주간지 타임은 미국을 움직인 100대 인물로 그랜마 모세스를 선정했습니다.
아나마리 로벗슨은 모세스는 1860년 9월 7일 뉴욕 주의 그린위치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집안의 10남매중 세째였습니다. 아버지는 농부였습니다. 어렸을 때 아나마리는 교실 한 칸 짜리 시골 학교에 잠깐 다녔는데, 그것이 학력의 전부입니다.
아나마리는 12살부터는 어느 부잣집의 가정부로 들어갔습니다. 농장 일도 해주고 집 안팎 청소도 하고 음식도 준비하고 바느질도 했습니다. 하루하루 고된 노동의 대가로 그녀가 얻은 것은 식사 제공이 고작이었습니다. 이런 생활은 무려 15년이나 계속됐습니다. 아나마리는 종종 담쟁이라든지 레몬 등과 같은 식물에서 나는 색 갈을 이용해 판대기나 벽에 칠을 해보곤 했습니다.
아나마리는 1887년에 같은 농장에 고용돼 온 토머스 모세스라는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27살 때였습니다. 결혼 후 이들은 버지니아 주 스턴튼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이들은 주변의 큰 농장 4곳을 돌며 일을 해 생계를 꾸려나갔습니다. 거의 20년을 이렇게 살다가 열심히 모은 돈으로 농장을 하나 샀습니다.
아나마리와 토마스 부부는 자녀를 10명을 낳았지만 가난한 살림 때문에 5명이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천진난만한 풍경들은 아이들의 영혼을 위로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들 가족은 1905년에 뉴욕 주 이글 브릿지라는 곳으로 이사를 갑니다. 그러다 남편이 67세이던1927년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납니다. 아나마리 모세스의 삶은 더욱 고달픈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때 동생 셀레스치아가 그림을 그려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때 나이 78세.
그랜마 모세스는 옛날의 농촌 풍경을 그렸습니다. 배경은 주로 자신이 살던 버지니아 주, 그리고 미국 동북부의 풍경들입니다. 모세스는 전봇대라든가 트랙터 등 현대적인 존재는 그림에서 뺐습니다.
1938년 어느 날 뉴욕에 사는 루이스 칼도어라는 미술품 수집가가 모세스가 사는 지역을 방문했습니다. 칼도어는 길 거리 약국에 걸려 있는 그녀의 그림을 하나에 3달러 내지 5달러를 주고 10여개를 샀습니다. 그리고 뉴욕 맨해튼의 고급 화랑가에서 이를 전시했습니다. 그런데 전시 첫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모든 그림이 팔려 나간 겁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사람들은 또 그림을 그린 주인공이 80세에 가까운 시골 할머니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 뒤 모세스 할머니의 그림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현대미술관 주최 ‘무명의 미국 화가전’에 등장했습니다. 1940년에는그랜마 모세스 즉 모세스 할머니만의 개인전이 ‘한 농촌 부인의 그림’이라는 제목으로 열렸습니다. 그로부터 20년 동안 모세스 할머니의 작품전은 미국과 유럽 여러 곳에서 계속 열렸습니다. 유럽에서는 파리의 국립 근대미술관, 모스크바의 푸시킨 미술관 등에서15번이나 특별전이 열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한 폭에 3-5달러씩 하던 그랜마 모세스 할머니의 작품은8천 달러내지 만 달러에 팔렸습니다. 그 뒤에는 한 폭에 백만 달러까지 호가하게 됐습니다. 2006년에는 설탕 만들기라는 그림이 120만 달러에 팔리기도 했습니다.
1949년 해리 S. 트루만 대통령은 그랜마 모세스에게 가장 뛰어난 성공을 치하하는 내쇼날 프레스 클럽 여성 트로피를 수여했습니다. 같은 해 러셀 세이지 대학과 무어하우스 대학은 그녀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했습니다.
1952년에는 그녀의 일생을 소재로 한 자서전 <내 삶의 역사 My Life’s History>가 발간됐습니다. 그랜마 모세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 일생은 충실히 보낸 하루와 같았다. 나는 행복했고 만족했다. 나는 어떤 것도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고 주어진 삶을 최대한 잘 살았다. 삶이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그랜마 모세스는 1961년 12월 13일 뉴욕에서 101세로 타계했습니다. 그녀는 죽기 직전인 100세 때도 그림을 25점이나 그렸습니다. 마지막까지 열정을 다한 그의 따스한 그림들은 그가 떠난 후에도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그랜마 모세스의 사망 소식에 ‘미국인들의 삶에서 가장 사랑 받던 분이 떠났다. 그녀의 작품과 생애는 미국의 개척자적 유산을 새롭게 하고 농촌과 프론티어의 뿌리를 되새기게 했다’고 추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