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류학자 중 사람인 마거릿 미드에 대해 알아봅니다.
마거릿 미드는 지난 세기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문화 인류학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미드는 핵무기의 확산, 인종적 편견의 부당성을 제거하는 데도 앞장섰고, 여성의 권리와 환경보호의 주창자이기도 했습니다.
마거릿 미드는 1901년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명문 대학인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경영대학원 교수, 어머니는 사회학자였습니다. 그녀는 인디애나주의 드포대학교(DePauw University)를 거쳐 뉴욕의 버나드컬리지, 컬럼비아대학에서 인류학을 공부했습니다.
미드는 ‘미국 인류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프란츠 보아스 한테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보아스 교수는, 사람은 가족의 유전적인 요인에서가 아니라 자라는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믿는 학자였습니다. 박사 학위를 받은 미드도 그의 영향을 받아, 서방 세계의 종교와 기술에 접촉이 없고, 문화가 사라져가는 곳에 가서 연구해보고 싶었습니다.
미드는 1925년 사모아군도로 갔습니다. 타우섬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발견한 것은 그곳 여성들이 다른 사회에서와 같은 분노나 복수심 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또 그들의 사회에서는 여성이 한 남자와만 이성 관계를 갖도록 요구하지 않았고 결혼 전의 성관계를 부정한 것으로 보지도 않
았습니다.
미드는 미국으로 돌아와 ‘Coming of Age in Samoa’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사모아에서 성장한다는 것’이라는 의미인 이 책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당시 최고의 판매 부수를 기록했습니다. 많은 독자는 사모아의 젊은 여인들이 즐기는 성적 자유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미드가 주목한 또 한 가지 사실은 사춘기의 행동은 당시 심리학자들이 생각했던 것과 같이 호르몬의 변화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제도에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미드는 사모아 연구 후 뉴욕의 미국자연사박물관 학예 책임자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50년 동안 이 박물관은 미드의 직장이자 연구의 중심이 됐습니다. 미드는 뉴기니에 대한 연구도 집중했습니다. 47년 동안 그곳을 방문한 횟수가 일곱 차례나 됐습니다.
1935년 미드는 ‘세 원시 사회에서의 성과 기질’이라는 또 하나의 유명한 저서를 냈습니다. 이 책은 뉴기니의 3개 종족 사람들이 아기 때부터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연구한 것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미드는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 구분도 특정 사회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점을 지적하면서, 모든 사회 현상은 그 사회의 역사 문화적 맥락에서 분석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성격 차이라는 것은 성별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사회의 문화적 전통을 반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은 미국에서 여성의 권리 증진 운동이 벌어졌을 때 중요한 인용 자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미드는 세 번 결혼했습니다. 대학원 재학중일 때 신학을 공부하던 루서 크레스맨과 결혼했고 1928년에는 뉴질랜드의 인류학 전공 학생 리오 포춘과 재혼했습니다. 1936년에는 세 번째로 영국 생물학자인 그레고리 베잇슨과 결혼했습니다. 세 번의 결혼은 눈총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미드는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갔습니다.
그녀의 저서는 잘 팔려나갔고, 잡지에 실리는 그녀의 글은 독자들의 흥미를 북돋웠습니다. 1960년대와 70년대 미드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인기 있는 출연자였습니다. 미드는 학문 탐구와 후배 양성뿐 아니라 날카로운 문화 비평과 대중 교육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미드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였지만 다른 여러 대학에서도 강의했습니다. 그녀의 강좌는 주로 어린이 성장 문제, 다양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특성과 문화 등이었습니다.
미드는 환경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1970년 4월 22일, 환경운동가들이 처음으로 지구의 날을 제정했을 때 미드는 “깨어지기 쉽고, 단 하나뿐이며,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인 이 지구를 보호하는 강력한 기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미국 과학발전 협회 회장으로 추대된 미드는 암으로 생이 거의 마감될 때까지 여행과 연설,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그의 연구가 과학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특정 지역에 떠도는 이야기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개발 지역 원주민들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연구로 20세기 사회 과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1978년 미드가 만 77세를 1달 앞두고 사망했을 때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그녀를 추모하는 행사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지미 카터 대통령은 미국 민간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그녀가 연구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던 뉴기니의 한 작은 마을 사람들도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코코넛 나무를 심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