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대기권 밖을 비행한 최초의 미국 우주인 앨런 셰퍼드에 대해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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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5일 앨런 셰퍼드는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지구 대기권을 벗어나는 우주 비행을 기록했습니다. 셰퍼드는 우주선 ‘Freedom Seven’, 즉 ‘자유 7호’를 타고 약 15분 동안 우주를 비행하고 돌아왔습니다. 비록 짧은 우주 비행이었지만 셰퍼드는 미국의 영웅이었습니다.
이에 앞서 1957년 소련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했습니다. 작은 위성이었지만 이 사건은 미국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물건을 처음 우주로 날려보낸 기술은 물론 강력한 로켓은 군사적으로도 미국에 큰 위협으로 떠올랐습니다.
1961년 4월 12일,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우주로 날아가면서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도 소련이 먼저 기선을 잡았습니다. 가가린은 108분 동안 지구를 한 바퀴 돌고 귀환했습니다.
미국인들이 실망과 초조감에 젖어 있을 때 이들의 용기를 다시 북돋아 준 인물이 바로 37세의 해군 조종사 앨런 셰퍼드였습니다. 앨런 셰퍼드의 본명은 앨런 바틀렛 셰퍼드 주니어 (Alan Bartlett Shepard Junior)로 1923년 미국 북동부 뉴햄프셔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셰퍼드는 1944년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2차 대전 중에는 잠시 동안 구축함에 배치돼 태평양 전선에서 복무했습니다.
1947년 셰퍼드는 해군 조종사가 됐습니다. 이 무렵 미국은 우주기구 설립을 위해 적극 나섰습니다. 의회는 항공우주국(NASA) 설립 법안을 통과시켰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즉각 이에 서명했습니다.
나사는 설립 후 우주비행을 위한 머큐리 계획을 마련했습니다. 미국 최초의 우주인 팀은 앨런 셰퍼드를 포함해, 나중에 최초로 지구 궤도를 선회한 존 글렌 등 7명이었습니다. 나사는 1961년 1월 말 ‘햄’이라는 이름의 침팬지를 우주로 발사했습니다. 침팬지는 대서양 상공 우주를 약 700km 비행하고 돌아왔습니다.
1961년 5월 5일에는 앨런 셰퍼드가 우주로 향했습니다. 소련의 유리 가가린보다 약 한 달 늦은 시점이었습니다. 총 15분짜리 우주 비행은 우주선이 케이프 캐너배럴에서 약 500km 떨어진 바다에 내려앉으며 끝났습니다. 그로부터 3주 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0년대에 사람을 달에 보내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그러한 꿈은 1969년 7월 닐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딤으로써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앨런 셰퍼드는 귀에 이상이 생겨 여러 해 동안 우주 비행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귓병 치료가 끝나자 항공우주국은 셰퍼드를 아폴로 14호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셰퍼드는 1971년 1월 말, 스튜어드 루사, 에드거 미첼과 아폴로 14호를 타고 달을 향해 떠났습니다.
셰퍼드와 미첼은 달 표면에 내려 돌과 흙을 채집했습니다. 셰퍼드는 달에서 골프도 쳤습니다. 두터운 우주복 때문에 공을 맞추기가 어려웠으나 맞기만 하면 공이 여러 마일을 날아갔다고 셰퍼드는 우주 본부에 보고했습니다. 달의 중력은 지구의 6분의 1밖에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은 위성 발사와 인간의 우주 비행에서, 처음에는 소련에 약간 뒤졌지만, 1969년부터 1972년 사이 12명이 달 표면을 걷고 돌아왔습니다.
셰퍼드는 1974년에 해군에서 은퇴했습니다. 은퇴 전에는 해군 제독으로 승진했습니다. 셰퍼드는 우주인 데크 슬레이튼과 함께 ‘문샷(Moon Shot)’이라는 책도 펴냈습니다. 과학 기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조성 사업도 추진했습니다.
백혈병을 앓고 있던 앨런 셰퍼드는 1998년 7월 21일 74세로 타계했습니다. 셰퍼드의 첫 우주 비행은 비록 짧았지만 그는 미국 우주 개척사의 새로운 장을 연 역사적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