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뮤지컬 영화의 판도를 바꾼 댄서 프레드 애스테어에 대해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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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 애스테어는 미국의 댄서이자 안무가면서, 배우에 가수이기도 합니다. 애스테어는 뉴욕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극장가와 캘리포니아 할리우드의 영화계에서 70여 년 동안 30여 편의 뮤지컬 영화를 비롯해 많은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미국영화연구소(AFI)는 프레드 애스테어를 미국의 위대한 남자 배우 25명 중에서 5위에 선정했습니다. 미국 뮤지컬 영화를 이끌었던 또 한 사람의 귀재 진 켈리도 ‘영화에서 춤의 역사는 바로 애스테어와 함께 시작했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는 영화와 춤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프레드 애스테어는 1899년 미국 중부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양조장 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프레데릭 오스털릿즈(Frederic “Fritz” Austerlitz)는 오스트리아에서 이주한 맥주 기술자였습니다. 프레드는 어렸을 적부터 두 살 위인 누나 아델(Adele)과 함께 춤을 배웠습니다. 어머니 앤 젤리우스 오스털릿즈(Johanna “Ann” Geilus Austerlitz)는 남매에게 춤을 더 잘 가르치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대도시 뉴욕으로 갔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프레드가 양조 기술을 배워 사업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워낙 이들이 춤과 노래를 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 한데다, 어머니가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나 아델과 함께 댄스 교습소에 들어간 프레드는 춤, 피아노, 아코디언, 노래 등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워낙 재주가 뛰어나서 불과 10살 때 프레드는 누나와 함께 처음으로 전문적인 예술 무대에서 춤을 선보였습니다. 17살 때는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처음으로 공연했는데, 관중으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때 한 비평가는 애스테어가 마치 뼈가 없는 것처럼 유연하게 춤을 춘다고 평했습니다.
그 후 애스테어는 금방 뮤지컬의 중심지인 브로드웨이에서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1920년대 이들 남매는 무려 10편이 넘는 쇼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습니다. 이들은 영국에 가서도 공연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누나 아델이 영국 남성과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혼자 남게 된 프레드는 실망하지 않고 영화 쪽으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 무렵 미국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경제공황을 겪고 있어 일자리를 찾는 건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는 누나와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샘플 영화를 보여주며, 영화사를 찾아다녔습니다. 한 영화사 관계자는 그 영화를 보고 ‘연기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고, 약간 대머리인데, 춤은 조금 출 줄 안다’고 혹평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애스테어는 가까스로 영화계에 일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애스테어는 결국 춤과 노래로 미국 최고의 스타로 올라서게 됩니다.
프레드가 처음 출연한 영화는 ‘리오로 날아가다(Flying Down To Rio)’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애스테어는 진저 로저스(Ginger Rogers)라는 젊은 여성과 처음으로 함께 춤을 추었습니다. 이들은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영화 속에서 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는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남자라면 정의로운 사나이 같은 역할이 주를 이루던 시기에 남자가 춤을 춘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스테어와 진저 로저스가 춘 카리오카(The Carioca)라는 춤은 경쾌한 리듬과 현란한 탭 댄스로 황폐감에 싸여있던 미국인들에게 활력소가 됐고, 영화의 또 하나의 매력적인 요소가 된다는 점을 각인시켰습니다.
애스테어와 진저 로저스는 약 10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했습니다. 이들의 춤은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교댄스(Ballroom Dance)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한 댄스 비평가는 “애스테어와 로저스는 지금까지의 영화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팀을 이루고 있다. 이들의 춤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감정을 가장 진지하게 표현하는 도구이다. 이러한 춤은 영화에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극찬했습니다.
프레스 애스테어는 리타 헤이워스, 주디 갈런드 등 당대를 주름잡던 유명 배우들과도 춤을 추었습니다. 애스테어는 가끔 대단히 특이한 곳에서 혼자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영화 ‘로열웨딩( Royal Wedding)’에서는 벽에서, 또 천정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벨 오브 뉴욕(The Belle of New York)’에서는 지붕 위에서 춤췄습니다. 물론 이러한 장면은 카메라의 기법을 동원한 것이었습니다. ‘춤을 출까요(Shall We Dance)’에서는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홀리데이인(Holiday Inn)’에서는 발에 폭죽을 달고 춤췄습니다.
애스테어의 춤은 아주 쉬운 동작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엄청난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애스테어와 그 상대역은 댄스의 스텝이나 동작 하나하나를 위해 몇 주씩 연습하곤 했습니다. 그는 또 카메라에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 춤을 한 번에 다 담았습니다.
앞서의 감독들은 댄서가 춤을 출 때 한쪽 모습을 찍은 다음 또 다른 면을 찍어 이를 나중에 편집했습니다. 애스테어는 절대로 이런 방식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영화의 관객들은 댄서의 춤 전체를 한꺼번에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습니다. 춤을 실제보다 빠르게, 또는 부드럽게 조작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영화와 텔레비전으로 많은 상을 받은 애스테어도 나이에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70세를 넘기자 춤이란 영원히 출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하면서 무대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러면서 또 누구도, 자신까지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도 그는 딱 한 차례 더 춤을 추었습니다. 바로 또 한 사람의 뛰어난 춤꾼 진 켈리와 함께 출연한 영화 ‘엔터테인먼트(That's Entertainment)’ 2편에서였습니다. 사실 프레드가 언제나 춤추는 사람으로만 나오는 건 아니었습니다. 1959년 영화 ‘해변에서(On The Beach)’를 비롯해 여러 영화와 텔레비전 연속극에서는 댄서가 아니라 연기자로도 출연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댄서’, ‘완벽한 춤’의 대명사였던 프레드 애스테어는 1987년 8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계의 많은 영화 애호가들은 필림 속에 영원히 존재하는 작품들을 남긴 위대한 연예인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