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따라잡기] 동남아시아국가연합 (ASEAN·아세안)

지난 26일 제39차 동남아시아국가연합 (ASEAN ·아세안) 정상회의가 화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뉴스의 배경과 관련 용어를 설명해드리는 ‘뉴스 따라잡기’ 시간입니다. 제38차와 39차 동남아시아국가연합 (ASEAN ·아세안) 정상회의가 26일부터 28일까지 화상으로 열렸습니다. 미국도 4년 만에 아세안 정상회의에 참석했는데요.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 아세안에 대해 알아봅니다.

“아세안이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은 동남아시아에 있는 10개국으로 이뤄진 정치·경제·사회·문화 공동체입니다.

‘동남아시아연합(ASA)’이라는 공동체를 전신으로 한 아세안은 1967년 8월 출범했는데요. 처음에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등 5개국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1984년 신생 독립국인 브루나이가 6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고요. 1995년에는 베트남이 7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습니다. 그리고 1997년 라오스와 미얀마가 함께 가입하는데요. 캄보디아도 이때 라오스, 미얀마와 함께 가입을 신청했지만, 쿠데타로 국내 정치 상황이 불안정해 금방 합류하지 못했고요. 1999년 뒤늦게 10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면서 오늘날 ASEAN의 모양이 갖춰졌습니다.

“아세안의 출범 목적”

아세안은 1967년 출범하면서 “One Vision, One Identity, One Community”를 표어(Motto)로 삼았습니다. 즉 하나의 비전, 하나의 정체성, 하나의 공동체가 아세안이 지향하는 꿈이자 목표인데요. 하나의 공동체로서,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자는 기치 아래 아세안은 회원국의 전방위적인 발전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아세안은 크게 정치·안보, 경제, 사회·문화 등 3개의 축으로 구성돼 있는데요.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축은 경제공동체입니다.

회원국 간의 단일시장 구축과 균형 있는 경제 발전을 꾸준히 모색해온 아세안은 중국과 함께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을 수년째 추진했는데요. 그 결과 2020년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라는 거대한 자유무역협정을 출범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아세안의 상설 사무국은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 있고요. 아세안 의장국은 회원국의 영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매년 돌아가며 맡는데요. 올해 의장국은 브루나이입니다. 그리고 임기 5년의 사무총장 역시 알파벳 순서에 따라 돌아가며 맡는데요. 현재 아세안 사무총장은 2018년 취임한 브루나이 출신의 림 족 호이 사무총장입니다.

“아세안의 이모저모”

아세안 10개 회원국의 국토를 다 합치면 약 440만㎢에 달합니다. 그리고 2021년 기준 아세안의 인구는 약 6억7천만 명으로 전 세계 인구의 약 8.6%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회원국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는 인구 2억8천만 명에 달하는 세계 4위의 인구 대국인 인도네시아고요. 가장 적은 나라는 국민 전체 수가 45만 명에 불과한 브루나이입니다.

아세안 회원국들의 전체 국내총생산(GDP)은 2020년 기준, 약 3조 달러로 추산되고요. 이들 10개 회원국이 역내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 중국과의 관계”

아세안은 출범 이후 영향력 확대를 모색하며 주요 국가들과의 접촉을 확장해왔습니다.

그에 따라 주요 국가들을 몇 개의 그룹으로 구분하고 있는데요. 가장 중요한 그룹으로 평가받는 공식 대화 상대국은 아세안 회원국 수와 같은 10개국이 지정돼 있습니다.

아세안의 공식 대화 상대국은 미국과 캐나다, 유럽연합(EU),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인도,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입니다.

미국의 경우 1977년 공식 대화 상대국의 지위를 부여받았고요. 이후 아세안과 돈독한 협력을 유지해왔습니다. 지난 2016년 바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에는 미국에서 아세안 정상회의가 열린 적도 있습니다.

특히 아세안은 미국의 네 번째로 큰 교역 상대국으로 미국과 아세안 회원국 간의 교역은 매년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과 아세안의 교역은 약 3천620억 달러 규모에 달합니다.

이런 가운데 최근 몇 년간 남중국해를 포함한 인도·태평양의 평화와 번영, 안보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미국 정부는 아세안과의 정치, 외교, 군사적 협력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26일, 아세안 정상회의에 참석해 아세안과의 협력을 위해 1억 200만 달러를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는데요. 이 지원금은 기후변화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대응, 교육과 기술 혁신 등 비군사적 용도로 사용됩니다.

중국은 이번 정상회의에 리커창 총리가 참석했는데요. 대신 중국은 다음 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아세안 정상들만 참석하는 특별 정상회담 개최를 제안하는 등 미국을 견제하는 양상입니다.

아세안은 현재 중국과의 적극적인 경제협력을 도모하는 한편으로 중국의 남중국해 도발과 군사적 확장에는 불만과 우려를 제기하며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재 아세안 10개 회원국 가운데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등 4개국이 중국과 영유권 갈등을 벌이고 있습니다.

“뜨거운 감자 미얀마”

현재 미얀마는 아세안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습니다. 미얀마 군부는 지난 2월 쿠데타를 일으켜 민간정부를 축출한 후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민들을 유혈 진압해왔는데요.

이후 아세안은 회원국인 미얀마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민아웅 흘라잉 미얀마군 최고사령관을 불러 설득에 나섰고요. 즉각적인 폭력 중단 등 5개 항의 합의 사항을 끌어냈습니다.

하지만 이후로도 미얀마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자, 아세안은 이번 정상회의에 민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의 참석을 배제했습니다.

당초 회원국 간에는 내정 불간섭이라는 아세안의 오랜 기조를 지켜야 한다는 의견과 안권 탄압을 자행하는 군부에 제재를 가해 아세안의 가치와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이 갈렸는데요. 결국 아세안은 대의와 신뢰를 위해 흘라잉 사령관을 초청하지 않기로 한 겁니다.

이에 대해 미얀마 군부는 미얀마는 정상회의에 참석할 정당한 자격이 있으며, 아세안의 헌장과 규정에 반하는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했는데요. 이에 대해 아세안 정상들은 26일, 의장 성명을 통해 합의사항의 즉각적인 이행을 촉구하며 군부를 다시 한번 압박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제재 방안 등 후속 조처가 없어 아세안 의장 성명이 별다른 효력이 발휘하지 못할 거라는 관측이 지배적인데요. 향후 미얀마 군부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지난 1988년 9월 17일 서울종합경기장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노태우(가운데) 당시 한국 대통령이 부인 김옥숙 여사와 함께 인사하고 있다.

최근 뉴스의 화제 인물을 소개하는 ‘뉴스 속 인물’ 시간입니다. 오늘 주인공은 노태우 전 한국 대통령입니다.

10월 26일, 노태우 전 한국 대통령이 향년 89세를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후, 당시 육군대장이었던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함께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핵심 주역이자 한국의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입니다.

노 전 대통령은 1932년생으로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학창 시절 유순하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지만 가난한 가정형편으로 숙부의 도움으로 중학교에 진학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징집됐으며, 대구 헌병학교를 거쳐 1951년 정식으로 4년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때 같은 대구 출신이자 동기생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1979년 10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암살된 후 한국은 극도의 혼란을 겪었는데요. 이해 12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노태우 제9사단장 등 군 장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합니다.그리고 군부는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시위를 유혈 진압합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한국 역사상 직선제를 통해 당선된 첫 번째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7년 임기 말, 평화적인 정권 교체라는 명분으로 직선제를 거부하고 노태우 전 대통령을 후계자로 지명했습니다.

이에 한국에서는 학생, 직장인 등을 중심으로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고, 결국 그는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합니다.

군 출신인 노태우 전 대통령은 유세 기간, 자신을 보통사람이라고 부르며 온건한 이미지를 부각했습니다.

그리고 12월 대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한국의 거물급 정치인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뒀습니다.

대통령 재임시절 그는 구소련의 몰락과 동유럽 국가들의 해체 시기와 맞물려, 북방 외교 정책을 추진하면서 구소련권 국가들과 적극적인 관계 구축에 나섰습니다.

또 그의 재임 기간, 북한과의 관계도 개선돼 1990년 남한과 북한은 사상 첫 고위급 회담을 열었고, 1991년에는 유엔에 동시 가입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1988년 치른 서울하계올림픽대회를성공적으로 치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임 중 강력한 지도력 부족으로 이른바 ‘물태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퇴임 후 반란과 반역, 부패 혐의로 기소된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5년 1심 재판에서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1997년 대법원에서 17년 형이 확정됐으나, 같은 해 12월에 김대중 정부의 특별 사면으로 석방됐습니다.

이후 그는 정치 활동과 행사 참여 등 외부 활동을 자제하며 조용히 지내왔으며, 약 10년 전부터 지병으로 치료를 받아왔습니다.

최근 병세가 악화한 그는 평소 광주 희생자들과 재임 시 있었던 과오에 대한 용서를 빌었다고 유족들은 전했습니다.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에 대해 살펴봤고요. 뉴스 속 인물로 노태우 전 한국 대통령에 대해 알아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