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크리스마스 기적’으로 불린 ‘흥남철수’ 작전에서 활약했던 로버트 러니 전 미 해군 제독이 최근 별세했습니다. 장례식에는 한국인들도 참석해 고인을 추모했고 고인의 헌신과 용기를 기리는 추모 메시지도 이어졌습니다. 박형주 기자가 보도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1만 4천여 명의 피란민을 탈출시킨 ‘흥남철수’ 작전에 참여했던 로버트 러니 전 미 해군 제독이 최근 별세했습니다.
러니 전 제독의 아들 알렉스 러니 씨는 17일 VOA와의 전화 통화에서 아버지가 지난 10일 어머니와 자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94세를 일기로 평화롭게 잠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러니 전 제독은 약 2년 전부터 안 좋았던 건강이 몇 달 전부터 악화됐고 지난주 초 병원에 입원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알렉스 러니 씨는 뉴욕 브롱스빌의 세인트 요셉 성당(St Joseph’s Church)에서 15일 열린 장례식에는 해군 전우 등 지인들은 물론 친분이 없었던 한국인들도 언론을 통해 부고를 접하고 찾아와 자신의 아버지를 추모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러니 전 제독 아들]“there were a number of Koreans that came as well that had never even met my father. But they had seen the news and they wanted to pay their respects as well.”
미 ‘뉴욕타임스’ 신문은 부고를 통해 러니 전 제독이 “1950년 12월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양구조 중 하나’인 흥남철수 작전에 참여하며 용기와 역량을 보여준 공로”로 여러 표창을 받았다며 고인의 한국전쟁 참전 이력을 소개했습니다.
1927년 뉴욕시에서 출생한 러니 전 제독은 17세 때 해군에 입대해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일등항해사로 참전했습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인천상륙작전 등에서 화물 수송을 맡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함경남도 지역에 대량 피난민이 발생하자 흥남으로 이동했습니다.
이후 탑승 정원의 230배나 되는 1만 4천여 명을 태우고 추위와 배고픔, 공포 속에 목숨을 건 항해 끝에 1950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에 한국 거제도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피란민 중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었고, 운항 중 배 안에서 5명의 아기가 태어나는 경사도 있었습니다.
이 항해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렸고, 빅토리호는 역사상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기적의 배로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됐습니다. 또 한국에서는 흥남철수 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녹취: 영화 '국제시장'] “(번역) (선원) 안됩니다. 배 안은 무기들로 꽉 차있습니다. 피란민들을 태울 자리 없습니다. (라루 선장) 장군의 명령이다. 배에 선적한 무기들을 모두 버리고 피란민들을 태운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은 이후 40여년 간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수도자의 길을 걷다 2001년 세상을 떠났고, 현재 가톨릭 교회는 그를 ‘성인(Sainthood)’으로 추대하는 절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라루 선장과 함께 흥남철수 작전에 참여했던 러니 일등항해사는 정전 이후에도 뉴욕주 해상민병대로 43년 복무하다 1987년 제독으로 전역한 뒤 변호사로 활동했습니다.
1997년과 1998년에는 미 국무부 요청으로 미군 실종자 유해 발굴 작업의 참관인으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러니 전 제독은 2020년 6월 VOA 한국어 서비스와 인터뷰에서, 70년 전 작전을 회고하며 피난민들의 원활한 협조로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며 공을 한국인들에게 돌렸습니다.
[러니 전 제독] “피난민들이 동요하지 않고 매우 침착했습니다. 진정한 영웅은 한국민이었습니다. 오히려 우리 승무원들이 한국말 “빨리 빨리”를 즉석에서 배워 한 명이라도 더 태울 수 있도록 다그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러니 전 제독의 아들 알렉스 씨는 아버지가 크리스마스 무렵엔 특히 흥남철수 작전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당시 피난민 아들이 훗날 한국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놀라워했으며, 이후 미국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났고 한국 청와대에도 초청을 받았다고 소개했습니다.
또 전쟁으로 황폐해진 한국이 경제 강국으로 성장하는 등 짧은 기간 한국이 이룬 성취를 보고 뿌듯해했다고 전했습니다.
[녹취: 러니 전 제독 아들] “he always remembered that he talked about often, especially around Christmas time… he was so impressed with what South Korea had done…”
러니 전 제독은 지난해까지 얼마 남지 않은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생존 선원들과도 왕래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기관사였던 멀 스미스 씨가 아들 집에서 불과 1마일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지난 가을 마지막으로 만나 함께 식사하며 흥남철수 작전과 한국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아들 알렉스 씨는 러니 전 제독이 사망한 뒤 아버지의 옛 전우인 스미스 씨에게 전화해 아버지의 부고를 전했고, 스미스 씨는 전쟁 이후 70년 동안 왕래해왔던 좋은 친구의 죽음에 무척 슬퍼했다고 전했습니다.
미국과 한국 등에서도 고인을 추모하는 메시지가 이어졌습니다.
‘주한미군전우회’ 회장인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17일 VOA에 “그의 업적은 수많은 흥남철수 피난민 후손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을 것”이라며 고인을 기렸습니다.
미국의 민간단체 ‘코리아소사이어티’도 자체 홈페이지를 통해 “우리의 친구 로버트 러니 제독을 기억한다”는 추모 글과 함께 흥남철수 작전을 소개하는 영상을 공유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국가보훈처 명의의 조문을 통해 “한국의 자유와 평화에 헌신한 흥남 철수 작전의 영웅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며 “혈맹으로 맺어진 한미 동맹이 미래 세대에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박형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