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참전용사인 찰스 랭글 전 하원의원은 무엇보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낸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습니다. 랭글 전 하원의원은 한국전쟁 발발 73주년을 맞아 29일 VOA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이산가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며 한반도 통일을 염원하기도 했습니다. 46년간 연방의회에서 활발하게 한반도 관련 활동을 펼친 랭글 전 의원은 유엔에 파견된 북한 외교관들을 만나 자신의 의견을 전하기도 했다고 밝혔습니다. 과거 미 의회 내 ‘한국전쟁 참전 4인방’ 중 유일한 생존자인 랭글 전 의원을 조은정 기자가 인터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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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랭글 의원님,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3년이 됐습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돼 있습니다. 한반도와 관련해 어떤 진전을 보고 싶으십니까?
랭글 전 의원) 한반도 통일을 보고 싶습니다. 한국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죠. 생김새도 비슷하고, 같은 핏줄에, 같은 문화, 무엇보다 같은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 떨어져 지낼 이유가 없습니다. 통일은 남북한 사람들을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신이 우리뿐 아니라 우리 자손들을 위해 원하는 일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기자) 지난 4월 미국을 국빈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은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참전용사 출신 미국 하원의원들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고 존 코니어스 의원님, 고 샘 존슨 의원님, 고 하워드 코블 의원님과 랭글 의원님을 호명했는데요. 어떠셨습니까?
랭글 전 의원) 저와 이 자리에 더 이상 함께하지 않는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냈다는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저는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그들이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18살에 입대해 20살에 해외로 파병됐죠. 전쟁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미국과 유엔이 나선 ‘치안 활동(Police Action)’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와 전우들은 우리가 어떤 상황을 보게 될 지 알지 못했습니다. 한국이 어떻게 재건될 지, 얼마나 강력한 미국의 동맹국이 될 지, 공산주의가 북한에 초래한 고통과 아픔을 보게 될 지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참전이 어떤 국제적인 의미가 있는 지 전혀 몰랐지만 저는 지금 자부심을 느낍니다. 한국이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누릴 수 있도록 제가 아주 작은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기자) 랭글 의원님, 18살에 입대해 1950년 20살의 나이에 ‘503 야전 포병대대’ 소속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셨습니다. 의원님께 한국전쟁 참전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랭글 전 의원) 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전쟁은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전쟁 중에는 증오가 쌓이고 모르는 사람을 죽입니다. 저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지 경험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대했을 때 저는 영웅이었습니다. 제 가슴에는 유엔과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제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군대를 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전쟁 동안 저는 155밀리 곡사포를 쏘고 소총을 조립하는 법을 배웠을 뿐이죠. 저는 재향군인회를 찾아갔고, 그들은 제가 고등학교와 대학을 마치고 변호사, 연방지검 검사가 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지원해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과 60년을 살았고 성인인 두 자녀가 있습니다. 저는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그 후 내게 나쁜 날은 없었다(And I haven’t had a bad day since)’라는 회고록을 썼죠. 정확히 말하면 중공군이 미군 제2 보병사단을 공격한 1950년 11월 30일 이래 나쁜 날이 없었죠. 저는 한국을 구하는데 기여했고, 훈련과 경험 덕분에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게 됐습니다.
기자) 군우리 전투는 어땠나요? 전우들을 이끌고 안전하게 탈출하는데 성공하셨죠?
랭글 전 의원) 우리가 중공군에게 포위됐을 때 주변에서 신음소리가 들리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중공군의 군화가 보였고, 갑자기 차량이 보였고, 비명소리가 들렸어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 같았습니다. 어차피 죽을 거면 탈출하다가 죽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산 속 골짜기에 있었는데 무덤 뒤에 숨으며 빠져나갔습니다. 지도와 나침반이 있었지만 무서워서 사용도 못했습니다. 심장마비에 걸릴 뻔인 3일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저는 들것에 실려 있었습니다. 장교가 다가와서 ‘당신의 영웅적인 행동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죠. 살아 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인간이 서로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요.
기자) 1971년부터 2017년까지 23선을 하시면서 한반도와 관련해 많은 입법 활동을 하셨습니다. 공동 발의하신 ‘한국전쟁 참전군인의 해’로 지정하는 결의안이 2012년 채택됐고, ‘한국전 참전용사를 기리는 추모벽 건립을 위한 법안’도 2016년에 채택됐습니다. ‘이산가족 상봉 촉구 결의안’과 ‘한반도 평화와 통일 촉구 결의안’을 발의하셨죠. 이렇게 한반도 관련 활동을 주도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랭글 전 의원) 한국전쟁 중 한국에 쌀을 보내려다가 곤경에 처한 한 젊은 한국인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모든 규칙을 어겼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렀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하원의장을 포함해 많은 친구를 사귀고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저는 하원의장을 통해 그를 만났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의 방식대로는 아니었지만 한국 국민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었죠. 그 이후 한나 김이라는 젊은 한국계 미국인 여성을 만났는데 그는 제가 한국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해줬습니다. 저는 유엔에 가기도 했습니다. 북한 대표들은 제가 누군지 알고 있었고 제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말이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남북한이 통일해야 한다고,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고 있기에 미국과 일본이 돕고 싶다고, 한국인들이 북한을 방문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가 말했죠.
기자) 미국 관리들이나 정치인들 중에 북한 외교관들을 직접 만난 분들은 별로 없는데요. 북한 외교관들에 대해 어떤 인상을 받으셨습니까?
랭글 전 의원) 그들이 한 말은 주로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미국도 당신처럼 이해심이 깊으면 좋겠군요’, ‘우리는 평화, 단합, 자유를 원합니다’였습니다. 마치 녹음기와 대화하는 것 같았죠. 국무부는 그들이 약간의 태도 변화가 있었다고 느꼈고 그 부분에 대해 저는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한국인들의 방북이나 식량지원에 대해 북한이 약간 태도를 바꿨다는 판단이었죠.
기자) 한국전쟁으로 헤어진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하셨는데요.
랭글 전 의원) 이산가족들의 숫자가 점점 더 줄어들고 있습니다. 상봉에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수명 때문입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저는 스무 살이었습니다. 73년 전이죠. 북한에서 태어났고, 북한에서 왔으며, 북한에 가족이 있다는 재미 한인들을 만난 기억이 납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출신인 찰스 랭글 전 하원의원으로부터 참전 경험과 한반도 관련 의정활동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인터뷰에 조은정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