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 전 대통령 한반도 유산 “전쟁 위기 방지” vs “북핵 장기화”

9일 군 의장대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 엄수된 국립대성당으로 운구하고 있다.

100세를 일기로 별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한반도 관련 유산은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한 결정이 미국과 북한 간 군사 충돌을 방지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한편, 그가 채택한 접근법이 북한 핵 문제의 장기화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제기됩니다. 특히 한국 등 동맹국의 인권 문제를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적대국에 대해선 온건한 태도를 보였던 점은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조은정 기자가 보도합니다.

에반스 리비어 전 국무부 동아태 담당 수석부차관보.

에반스 리비어 전 국무부 동아태 담당 수석부차관보는 카터 전 대통령의 정책 유산에서 한반도가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다고 평가했습니다.

“잠재적 충돌 방지”

리비어 전 수석부차관보는 1994년 카터 대통령의 방북과 관련해 "미국과 북한이 군사적 충돌로 치닫는 상황에서 극적인 개입을 통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잠재적인 충돌을 막았다고 강조했습니다.

[녹취: 리비어 전 수석부차관보] “His rather dramatic intervention, when it seemed like the United States and North Korea might be headed towards a military conflict was I think a really critical development. You know, after his presidency, it was a very troubling time, and there were lots of signs North Korea was moving full speed ahead on a nascent nuclear program, and that the United States was determined that that program be stopped, one by one means or another.”

특히 “북한은 초기 핵 프로그램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으며, 미국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이를 저지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며 “미국 정부 내 일부 고위 인사들이 군사적 옵션을 검토하던 시점에 카터 대통령이 개입했다”고 회고했습니다.

1994년 6월 북한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부인 로살린 카터 여사가 김일성 북한 주석을 만났다. 사진 = The Carter Center.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제39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촉발된 '1차 북핵 위기'가 고조되자 이듬해 6월 전격적으로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당시 빌 클린턴 행정부의 승인을 얻어 3박 4일간 북한을 방문하며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 회담했습니다. 이 회담을 통해 양측은 3단계 미북 회담 개최에 합의했으며, 북한은 영변 핵시설에서 무단 인출한 핵연료봉의 재처리를 유보하는 대신, 미국은 경수로 제공을 약속한다는 조건을 도출했습니다.

이후 1994년 10월 21일 체결된 제네바 기본합의는 북한의 핵 포기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허용, 북한 내 경수로 2기 건설, 연간 50만 톤의 중유 공급을 명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합의는 2003년 결국 파기됐고, 북한은 이후에도 핵 개발을 지속하며 국제 사회의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포토 갤러리]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주요 순간들

“대북 외교 가능성 탐색”

리비어 전 수석부차관보는 제네바 기본합의가 궁극적으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할 의사가 없었다는 점이 이후 명확해졌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이러한 접근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으며, 특히 긴장 완화에 기여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또한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은 “북한 지도부와의 대화 가능성을 입증한 사례였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만 당시 클린턴 행정부 내부에서는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을 두고 엇갈린 평가가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녹취: 리비어 전 수석부차관보] “We had a former American president up in North Korea, talking with the North Korean leader in a way that many people in Washington felt somewhat uncomfortable with, and felt that at least some aspect of what he was doing was undercutting the current president, President Clinton and and possibly undercutting US policy. It wasn't my view, but it was a view that some had.”

클린턴 행정부가 대북 군사 옵션을 신중히 검토하던 상황에서, 전직 대통령이 북한과 직접 대화를 나눈 것을 두고 워싱턴 내 일부 인사들이 불편함을 느낀 것은 사실이었다는 설명입니다.

리비어 전 수석부차관보는 일부에서는 카터 전 대통령의 이러한 행보가 클린턴 대통령과 행정부의 정책을 약화시킬 가능성을 우려했다고 전했습니다.

“북핵 문제 장기화로 이어져”

시드니 사일러 전 국가정보위원회(NIC) 북한 담당 국가정보분석관

6자회담 특사를 지낸 시드니 사일러 전 미 국가정보위원회 북한 담당 국가정보분석관도 VOA에 “기록에 따르면 당시 클린턴 팀은 예상치 못한 카터의 구상에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며 그 결과 “정책 결정의 폭이 좁아지고 실질적인 대안이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고 말했습니다.

사일러 전 분석관은 이러한 상황이 북한 핵 문제의 장기화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역사학자들은 유일한 북한 비핵화 방안은 무력 사용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라며 “하지만 무력을 통해 핵 프로그램을 늦추거나 중단하려는 노력은 1994년 당시만이 실질적으로 가능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사일러 전 분석관] “Any effort to slow or halt the nuclear program through the use of force was only possible then... as time went on and the arsenal grew, the cost of any military actions increased the confidence that you would have captured the whole program would diminish, and it became less and less feasible in the option.”

사일러 전 분석관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도널드 트럼프 1기 정부에서도 대북 무력 사용이 검토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북한의 핵무기 규모는 점점 커졌다”며 군사적 개입에 따른 비용은 더욱 증가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게다가 “북한 핵 프로그램 전체를 제거할 수 있다는 신뢰도마저 떨어지면서, 군사적 옵션의 실현 가능성은 점차 희박해졌다”고 덧붙였습니다.

사일러 전 분석관은 다만 “카터 전 대통령은 국가 간 대화의 중요성을 굳게 믿었던 낙관주의자였다”며 “그러한 접근법 자체는 긍정적인 면이 있으며, 이를 현명하게 활용할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지난 1979년 6월 한국을 방문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내외(왼쪽)를 박정희 전 한국 대통령(가운데)이 전용헬기로 안내하고 있다. 당시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비무장지대 DMZ를 방문해 하룻밤을 보냈다.

“주한미군 철수 추진… 한반도 안보에 부정적”

토머스 신킨 ‘알스트리트 연구소(R Street Institute)’ 정책 담당 국장. 사진 = R Street Institute.

국무부 출신의 토머스 신킨 알스트리트연구소 정책국장은 6일 VOA와 전화통화에서 “카터 전 대통령의 한반도 관련 유산은 공과가 엇갈린다”고 평가했습니다.

특히 “한편으로는 인권,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자유 증진을 지지한 반면, 한국의 안보와 관련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행동을 했다”며 카터 대통령이 재임 당시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했던 점을 지적했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대선 운동 기간부터 박정희 정권의 인권 문제를 비판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1977년 취임 이후 이를 본격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신킨 국장은 주한미군 철수 계획이 “매우 논란이 많았다”며, 당시 존 싱글러브 미8군 참모장이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일화를 상기시켰습니다.

[녹취: 신킨 국장] “It was highly controversial. You may remember the general Singlaub publicly protested. And I think that there was general consternation in the US, typically, when the US had fought a war and spilled blood, treasure, there was an inclination to keep troops on the ground afterwards. First of all, to ensure there wouldn't be a repetition of the conflict, and also to sort of keep the United States in the game, keep the United States interests protected.”

이어 “미국이 전쟁에서 인명과 자산 면에서 큰 희생을 치른 뒤에는 현지에 병력을 남겨두는 경향이 있다”며, 이는 “분쟁의 재발을 방지하고,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목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군대를 철수한 뒤 이를 되돌리기란 극히 어려운 만큼, 섣부른 결정은 매우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주한미군 철수계획, 미한 양국서 반대 직면”

클린트 워크 한미경제연구소(KEI) 연구원

카터 행정부 시절 미한 관계를 연구한 클린트 워크 한미경제연구소(KEI) 연구원은 6일에 “카터 전 대통령의 철수 계획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국방부를 포함해 그의 행정부 내 거의 모든 기관에서 반대에 부딪혔다”고 밝혔습니다.

워크 연구원은 당시 실무진이 철수 계획의 시행 과정에서 수정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신중하게 설계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주한미군 철수 계획은 단계적으로 폐지하거나 연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계됐다”는 것입니다.

주한미군 철수 계획에 대한 반대는 미국 내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워크 연구원은 “철수 계획은 한국에서도 강한 저항에 직면했다”며 “한국 정부뿐 아니라 일부 저명한 반체제 인사들까지 이에 반대했다”고 전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 등 당시 유신 체제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던 인물들조차 카터의 병력 철수 계획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설명입니다.

[녹취:워크 연구원] “What's interesting is even so political dissidents within South Korea at the time sort of, of course, well known ones like Kim Dae Jung, Cardinal Stephen Kim and others who are very critical, of course, of the Yushin system and park Chung Hee himself, they were not supportive of Carter's troop withdrawal policy. They even wrote letters directly to Carter asking him to move away from that policy

이어 당시 한국의 반체제 인사들이 “카터 전 대통령의 한국 인권 상황에 대한 비판은 받아들였지만, 전반적인 관계 안정을 원했다”며 “병력 철수로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 통치가 더 강력해질 가능성을 두려워했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워크 연구원은 일부 반체제 인사들은 심지어 카터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주한미군 철수 계획 철회를 요청하기도 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북한 지도부와 대화 모색”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의 인권 상황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은 것과 관련해, 워크 연구원은 “후임 레이건 정부는 카터 대통령이 동맹국의 인권 기록과 비민주적 관행에는 지나치게 비판적이면서도, 공산주의 국가들의 인권 침해에 대해서는 충분히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워크 연구원은 카터 전 대통령의 접근 방식에도 의미가 있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카터 전 대통령은 한반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북한 정권을 직접 상대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며 “북한 정권을 지나치게 비판하면 대화를 위한 환경을 조성할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이어 “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북한 지도부와의 직접적인 협력이 필수적”이라며, 카터 전 대통령의 접근법이 이러한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습니다.

VOA 뉴스 조은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