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해군 함정 북한 나포 50주년, 생사 확인과 송환 촉구

한국 해군 군함이 연평도 주변을 순찰하고 있다. (자료사진)

한국 국회의원 10명이 50년 전 북한에 나포된 한국 해군 함정 승조원 20명의 생사 확인과 송환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발의했습니다. 이 사건은 제네바협약 등 국제법 위반에 해당하지만, 북한 정권의 협력 거부와 역대 한국 정부의 해결 의지 부족으로 승조원들과 가족들이 오랜 세월 고통을 겪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김영권 기자가 보도합니다.

1970년 6월 5일, 한반도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한국 해군의 방송선인 120t급 I-2호정이 북한 경비정 두 척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았습니다.

양측은 치열한 교전을 벌였지만 I-2호정은 북한군에 나포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I-2호정에 탑승했던 한국 해군 승조원 20명이 전사하거나 북한 측에 생포돼 납북됐습니다.

한국 군사편찬연구소 학술지인 ‘군사’에 따르면 당시 한국 정부는 북한 정권을 규탄하고 미국과 함께 유엔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나포된 I-2호정과 승조원들의 송환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I-2호정을 나포하지 않았고 승조원들과 함께 서해에 모두 수장됐다는 주장을 반복했고, 정전위에서 여러 차례 진행된 협상은 아무런 진전 없이 끝났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 해군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이지만, 한국인들 사이에는 1968년 있었던 미 해군 정찰함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보다도 더 생소할 정도로 기억에서 사라진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국의 제1야당인 국민의힘 소속 하태경 의원 등 의원 10명은 11일 한국 해군 창설 75주년 기념일과 I-2호 나포 50주년을 맞아 승조원 20명의 생사 확인과 즉각적인 송환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발의했습니다.

최근 발생한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으로 한국에서 국가의 기본 책무인 국민보호 의무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나포 사건이 반세기 만에 다시 주목받은 겁니다.

의원들은 북한 정권의 도발 행위로 국가를 수호하던 장병들이 납북됐지만 한국 정부는 50년이 지나도록 생사 확인조차 하지 않고 있다며, 국제법에 따라 생사 확인과 송환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또 한국 정부가 남북한 양자 교섭과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의 문제 제기 등 해결을 위한 노력을 다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북한 당국의 승조원 송환 거부는 제네바협약을 거부하고 강제실종에 관한 유엔의 인권 관련 권고를 무시하는 것으로 한국 정부가 이를 적극 제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국제법 전문가인 전환기정의워킹그룹의 신희석 법률분석관은 12일 VOA에, 북한 당국의 조치는 국제법상 명백한 제네바협약 위반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신희석 법률분석관] “1970년 나포 당시에 북한은 전쟁포로 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약(제 3협약)의 당사국이었습니다. 이 협약은 교전 행위가 끝나면 전쟁포로들을 최대한 빨리 송환하라는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50년이 지나도록 이들에 대한 생사 확인을 제대로 안 하고 생포된 포로들에 대해 송환을 안 하는 것은 제네바협약 위반에 해당하는 겁니다.”

지난 2014년 3월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고 있는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자료사진)

신 분석관은 또 유엔 강제실종그룹(WGEID)이 실종 승조원 20명 중 2명에 대해 강제실종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북한 당국에 생사와 행방에 대해 계속 질의하고 있다며, I-2호정 나포 사건은 “분명한 국제 인도법과 인권법 위반”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유엔 강제실종그룹(WGEID)은 한국의 인권단체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이 승조원 중 정광모 병장과 도종무 중사 가족의 진정서를 지난 2013년과 2016년에 각각 제출한 뒤 연례 보고서에서 이들에 대한 생사 확인을 북한 당국에 계속 질의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태경 의원도 이날 보도자료에서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COI)는 최종보고서에서 북한의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납치 행위를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했다며, 납북 차원에서도 이 사건이 다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신 분석관은 역대 모든 한국 정부가 이 사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데 대해 책임이 있다며, 특히 나포 당시 한국 권위주의 군사정부의 비합리적 조치로 가족들이 고통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신희석 법률분석관] “그 당시 한국은 군사정권 시대였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연좌제에 걸릴 우려가 있어 가족이 오히려 전사 처리를 희망하기도 했습니다. 북한에 가족이 살아있다는 게 기록에 남으면 오히려 사회적 불이익을 받는 시대였기 때문에 가족이 언급을 꺼렸습니다. 정부도 어느 순간부터 시간이 지나면서 북한 측의 긍정적 답변이 없으니까 그냥 포기한 거죠.”

한국 군사편찬연구소 학술지인 ‘군사’ 106호에 따르면, 이런 상황 때문에 승조원 20명 중 18명의 가족이 전사 처리와 현충원 봉안에 동의했으며, 가족 중 한 명은 한국이 민주화된 뒤 언론에 “연좌제에 걸려들까 두려워 1996년에야 처음으로 통일부에 납북자 신고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아울러 당시 군사정부도 함정 나포 소식이 미칠 부정적 여론에 대한 부담으로 소극적으로 대처했고, 나포 10년 뒤인 1980년에야 승조원들에 대해 전사에 준하는 처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허위 월북 권유에 속아 북한에 가서 대남방송을 하다 탈북한 오길남 박사는 지난 1992년 한국 당국에, 북한 대남 심리전 방송인 ‘구국의 소리’ 방송 동료 가운데 한 명이 1970년 나포된 I-2호정 승조원 출신 문석영 당시 해군 소위였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신희석 분석관은 정황상 일부 승조원들이 북한에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며, 아픔을 오랜 세월 가슴에 품고 지낸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생사 확인과 송환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