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루치 "제네바합의 때 인권 누락은 잘못…실수 되풀이 말아야"

지난 1994년 10월 18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미국 측 핵 협상 대표였던 로버트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가 백악관에서 북한과의 제네바 합의 사실을 발표했다.

1994년 미-북 ‘제네바 기본합의’를 끌어냈던 로버트 갈루치 전 미 국무부 북핵특사가 당시 협상에서 인권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건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밝혔습니다. 30년 전의 실수가 또다시 반복돼선 안 되다는 건데, 워싱턴에서는 북한 인권 문제가 해소되지 않으면 관계 정상화는 물론 평화협정 체결도 어렵다는 인식이 우세합니다. 백성원 기자가 보도합니다.

갈루치 전 특사는 북한에 인권 개선을 압박하면 비핵화 협상이 위태로워진다는 일각의 주장을 일축하면서, 인권을 협상 의제로 올리지 않은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 밝혔습니다.

1차 북핵 위기를 제네바 합의로 수습했던 갈루치 전 특사는 VOA에 “나는 30년 전 제네바 기본합의 협상 당시 인권을 제기하기 원하지 않았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며 “그것은 아마도 실수였고, 지금은 명백한 실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로버트 갈루치 전 북핵특사] “I did not wish to address human rights thirty years ago when I negotiated the Agreed Framework. And I did not. That was probably a mistake; it certainly would be now.”

갈루치 전 특사는 “(미-북) 관계 정상화가 단지 수사가 아니라 북한에는 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수십 년에 걸쳐 깨닫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이 북한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정권 교체를 추진하지 않겠다고 보장해도 양국 관계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로버트 갈루치 전 북핵특사] “We have learned over the decades that normalization is NOT just rhetoric, it is essential to the North because, without it, US assurances of non-intervention or regime change are not credible and, without an evolution in DPRK human rights, normalization is politically implausible for the US.”

하지만 “미국이 인권을 개선하지 않는 북한과 관계 정상화를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어렵다”며 “우리는 스탈린주의 국가와 ‘정상적’ 관계를 맺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북한 정권 교체를 포기했다는 우리의 약속 역시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로버트 갈루치 전 북핵특사] “In short, we will not have ‘normal’ relations with a Stalinist state, and therefore we will not be credible in abandoning regime change.”

인권 개선이 담보되지 않으면 미-북 관계 정상화는 어렵고 북한은 계속 적국으로 남아있게 되는 만큼, 정권 붕괴를 추진하지 않는다는 미국 정부의 수사를 믿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성 메시지입니다.

갈루치 전 특사가 1994년 제네바 합의에 참여했던 미 외교 당국자 가운데 이례적으로 당시 합의 방식의 문제점을 인정하면서 “인권은 많은 이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한 데는 이처럼 북한 인권 상황이 결국 김정은 정권을 더 위태롭게 만들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있습니다.

[로버트 갈루치 전 북핵특사] “This is a more important question than many realize.”

실제로 갈루치 전 특사는 1994년 협상 당시 중대한 안보 위협인 핵 문제 논의에 인권 문제를 포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열악한 북한 인권 실태가 전 세계적 관심사로 떠오르자 북한과의 모든 협상에 인권 의제를 올려야 한다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특히 빅터 차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와 공동으로 집필한 대북정책 보고서와 뉴욕타임스 기고문 등을 통해 “핵 문제를 인권 의제에서 분리해 따로 협상하던 시절은 지났다”며 북한 인권 침해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 제기, 미 대통령의 인권 관련 권한 발동, 인권 제재 추가, 정보 유입 캠페인 강화, 노예 노동 근절, 투명한 인도주의적 지원 등을 제안해 왔습니다.

북한의 비핵화에 최우선 순위를 뒀던 미국의 다른 협상가들도 북한과의 협상이 재개되면 비핵화만을 위한 회담은 불가능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습니다.

6자회담 미국 수석대표를 지낸 크리스토퍼 힐 전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VOA와의 전화 통화에서 북한과의 모든 협상은 향후 미국과의 관계 재설정 과정의 일환인 만큼 다른 모든 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권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힐 전 차관보는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려면 여러 워킹그룹을 통해 많은 사안을 다뤄야 하며, 인권 기준과 방향에 대한 문제도 그중 하나”라고 지적했습니다.

[녹취: 크리스토퍼 힐 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Normalization with North Korea would require addressing a number of issues, probably through various working groups, and I believe that one of those issues that would need to be addressed is the question of some kind of human rights standards and direction.”

이어 “관계 정상화 과정에서 인권을 무시할 수 없으며, 이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는 구체적인 상황에 달렸지만, 인권은 평화협정이나 관계 정상화라는 더 광범위한 절차에 반영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크리스토퍼 힐 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I just think human rights cannot be ignored in the process of normalization. So how it's managed, of course, will depend on specific circumstances but it needs to be factored into any broader process of peace treaty or normalization.”

양국 간의 외교 관계를 구축하는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뿐 아니라 군사 행동을 중지하고 평화상태를 회복하기 위한 평화협정(Peace Treaty)을 체결할 때도 북한의 인권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인식을 확인한 겁니다.

지난 2007년 3월 베이징에서 열린 북 핵 6자회담에 빅터 차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보좌관(왼쪽)과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참석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담당 보좌관을 지내며 북핵 6자회담에 참여했던 빅터 차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도 지난달 27일 VOA에 “미-북 양국이 미래에 정상적인 정치적 관계를 갖기 위해선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에서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적절한 일”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빅터 차 CSIS 한국 석좌] “It is inevitable and appropriate for the U.S. to raise human rights in its conversations with North Korea if the two countries aspire to have a normal political relationship in the future.”

차 석좌는 “인권은 미국이 비핵화 협상에 대해 얼마나 진지한지 보여주는 신호”라면서 “(외부 지원) 공급망에서 자행되는 인권 침해를 고려할 때, 합의의 일부가 될 어떤 경제적 유인책도 인권 개선 없이는 제공될 수 없고, 미국법에도 그렇게 명시돼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빅터 차 CSIS 한국 석좌] “HR is a signal of how serious the US is about negotiations on the nuclear issue because any economic incentives that would be part of a deal cannot happen without an improvement in HR given HR violations along the supply chain (in accordance with U.S. Law).”

핵무기 등 북한의 군사 위협 제거에 협상 역량을 총동원했던 전직 협상가 겸 고위 외교 당국자들이 과거와 달리 인권 문제를 비핵화 목표와 동일시하는 이 같은 변화는 워싱턴에서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로버타 코헨 전 미국 국무부 인권담당 부차관보는 VOA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런 현상과 관련해 “5~8년 전부터 인권이 미-북 관계 정립의 일부가 돼야 한다는 공감대가 북한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훨씬 커졌다”고 설명했습니다.

[녹취: 로버타 코헨 전 국무부 부차관보] “There's been a much greater consensus among the experts that have dealt with North Korea that human rights has to be a part of the relationship. This is a thinking that has evolved over the past five or eight years, and it's very encouraging from that point of view, and the Congress has become involved and more NGOs and the United Nations involvement, also was a catalyst. The Commission of Inquiry Report, I think, made it very difficult for the North Korea experts say we're not involved in human rights to overlook that report and its findings.”

“미 의회와 비정부기구(NGO), 유엔이 이 문제에 관여한 것이 기폭제가 됐고, 특히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가 발표되면서 미국의 북한 전문가들이 인권 문제를 무시하기 어려워졌다”는 설명입니다.

코헨 전 부차관보는 “미-북 관계가 정상화되기 위해서는 비핵화 협상과 별도로 미 의회가 대북제재 해제 조건으로 제시한 각종 인권 침해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켰습니다.

[녹취: 로버타 코헨 전 국무부 부차관보] “There will be nuclear negotiations, but the part of it that would deal with normalization would have to involve the views of the Congress—congressional legislation that has been adopted that actually has a list of human rights issues that progress has to be made on in order for U.S. sanctions to be lifted…so normalization reflects the improvement in human rights conditions in order for that normalization to take place—one that would be accepted by Congress and the American people.”

2016년 2월 제정된 미국의 ‘대북제재와 정책 강화법’에 따르면 제재를 완화하거나 해제하기 위해선 위폐 제작 중단과 유엔 안보리 결의 준수 외에도 북한 억류 외국인 송환과 정치범 수용소 모든 정치범 석방, 개방적이고 투명한 사회 확립, 평화적 정치활동 검열 중단 등이 선행돼야 합니다. 미국이 인권 문제를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며, 북한의 인권탄압이 미국의 안보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미 조야의 인식을 반영합니다.

코헨 전 부차관보는 “북한 정권이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자 한다면 이 법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안에 중요하게 포함된 인권 문제를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녹취: 로버타 코헨 전 국무부 부차관보] “It is very important that they know that this act exists, that having a relationship with the United States means looking at this act and taking it into account, and also looking at the issues that were importantly included in the act, the human rights issues.

또한 “북한 인권과 정권의 본성이 한반도와 역내 평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게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유엔 안보리 북한인권 회의에서 도출된 결론이었다”며 “영속적인 평화는 핵 합의뿐 아니라 정권의 속성과 정책에 달린 만큼 인권은 평화협정의 조건이기도 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녹취: 로버타 코헨 전 국무부 부차관보] “From 2014 to 2017, the point made in those security council meetings that dealt with North Korea was the relationship of the human rights situation and nature of the North Korean regime, and peace and security on the peninsula in the region and internationally. The two became very strongly linked…when you now speak of a peace treaty with North Korea, the whole idea of a peace that is durable has to include not just a nuclear weapons agreement but a larger question of international peace and security. And that very much depends also on the kind of regime and its policies that have to do with human rights.”

북한이 미국과의 합의를 번번이 파기하고 핵 역량을 과시하는 양상이 반복되면서 정권의 성격을 규정하는 인권 침해와 북한 무기 프로그램은 서로 연결돼 있고, 어느 한쪽의 진전이 없으면 다른 한쪽 역시 해결되기 어렵다’는 인식이 워싱턴에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미-북 관계 재설정 조건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출범 직후부터 대북정책의 초점을 북한의 인권 개선에 맞추고 정권과 주민을 분리해서 다루겠다는 의지를 거듭 밝혀왔습니다.

국무부 대변인실 관계자는 지난달 27일 VOA에 “미국은 인권을 북한 등에 대한 외교 정책의 중심에 두는 데 전념하고 있으며, 북한에 대한 전반적인 접근에서 인권을 계속 우선시할 것”이라고 확인했습니다. 특히 “북한 같은 정권에는 반대하더라도 북한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앞서 대니얼 네이들 국무부 국제종교자유국장은 지난 5월 12일 “두 사안(핵과 인권)을 전체적으로 다루지 않으면 역내 영구적 평화와 안정이 축소될 것”이라며 인권과 역내 평화를 연계하는 바이든 행정부의 접근법을 분명히 했습니다.

VOA 뉴스 백성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