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 한국군 포로의 쓸쓸한 안장식..."국군포로, 관심의 사각지대"

8일 대전 국립현충원에서 한국군 포로의 안장식이 열렸다.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귀환했던 한국전쟁 한국군 포로들이 최근 잇따라 타계하면서 생존자가 20 명에 불과하다고 관련 단체가 밝혔습니다. 단체들은 한국 정부의 미온적 자세로 국군포로 실태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국민적 관심사도 매우 낮다며, 국군포로들을 더 예우해 주길 바란다고 호소했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보도합니다.

10여 년 전 탈북해 한국에 귀환한 한국전쟁 한국군(이하 국군) 포로 출신 우 모 씨가 지난 6일 별세해 8일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우 씨는 정전협정 전후 포로 교환 때 돌아오지 못한 수만 명의 국군포로 가운데 한 명으로, 북한의 한 탄광에서 수십 년 동안 강제노역을 한 끝에 자력으로 탈출해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는 8일 VOA에, 올해에만 우 씨를 비롯해 장 모, 이 모, 정 모 씨 등 네 명의 귀환 국군포로가 타계해 이제 20명만 남았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손명화 대표] “국군포로가 (한국에) 80분이 오셔서 올해에만 4분이 돌아가셔서 20명이 됐습니다. 1~2년 뒤면 (90세 이상 고령이라) 다 돌아가실 것 같습니다.”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COI)는 최종보고서에서 한국전쟁 정전 당시 8만 2천 명의 국군포로가 실종됐으며, 이 가운데 5~7만 명 정도가 포로로 억류된 채 한국에 복귀하지 못한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보고서는 특히 북한 정권이 정전협정 체결 뒤 국군포로들로 구성된 비자발적 건설여단을 만들어 강제로 북한 최북단의 탄광과 공장, 농촌으로 보내 강제 노역을 시켰고, 이후 외진 광산으로 보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게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 국방부는 이 가운데 지난 1994년 조창호 중위를 시작으로 2010년까지 모두 80명의 국군포로가 자력으로 탈북해 한국에 귀환했다고 국방백서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지난 2000년 한국에 귀환한 유영복 씨는8일 VOA에, 동료 노병들의 부고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착잡하다고 말했습니다.

국군포로 유영복 씨. (자료 사진)

[녹취: 유영복 씨] “같이 다 고생하다 온 분들이니까 좀 더 여생을 같이하면 좋겠는데, 이렇게 먼저 가시니까 너무 섭섭하고 허전한 마음 금할 수 없어요.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방도가 없지요. 북한에서 고역을 당한 후유증이 있는 데다가 노환까지 오니까 이제는 그렇지요.”

유 씨는 귀환한 국군포로들은 한국 정부의 지원과 좋은 복지 환경 때문에 건강을 유지했지만, 북한에 남은 동료들은 대부분 이미 숨졌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녹취: 유영복 씨] “여기 온 분들도 이제 70~80%가 돌아가셨는데, 모든 조건이 빈약한 북한에서 늙은이들이 살아남기 힘들어요. 더구나 국군포로 신분은 뭐 국가가 관심을 두나 뭐 모든 생활 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에 살아남기가 힘들어요. 안타깝죠. 같이 그분들도 다만 며칠이라도 대한민국이 이렇게 발전한 모습을 보고 했더라면 그분들도 여한이 없을 텐데. 어쩌겠습니까? 이제는 때가 너무 늦었죠.”

유엔 COI 최종보고서는 국군포로들이 강제노역뿐 아니라 북한에서 “가장 극심한 차별”과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연좌제로 북한 내 가족도 가장 낮은 ‘성분’으로 분류돼 자녀들은 고등교육 기회를 박탈당하고 아버지처럼 광산에서 최악의 일을 맡아야 했다고 덧붙였습니다.

국군포로 자녀인 손명화 대표는 연좌제로 당한 고통 때문에 고향을 쳐다보기도 싫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손명화 대표] “국군포로 아버지만 노예로 살게 했으면 됐지, 그 자식들에게 대대로 어떻게 행복과 꿈이란 게 없이 학교에서 공부를 잘해도 사회에 나가면 기회를 다 닫아버리고, 우리는 아버지가 괴뢰군 포로라는 그 출신성분 하나로 그 나라에서는 입을 닫고 그저 속으로 눈물을 떨구고. 이게 정상국가가 아니죠. 대다수가 고향이 그립다지만, 저는 고향에 대해 정말 돌아도 보기 싫습니다.”

한국 국방부는 국방백서에서 이런 국군포로와 가족들이 제3국으로 탈북할 경우 대책반을 구성해 신변 안전을 보장하고 국내로 송환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 국군포로 관련 법률 개정을 통해 귀환 국군포로에게 밀린 월급과 정착 지원금 등 수억 원과 임대주택을 제공하고 군인 연금과 의료비도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인권단체들은 한국 정부의 국군포로 송환 노력과 장례 예우가 상당히 미흡하다고 지적합니다.

국군포로와 가족들의 유엔 진정서 제출을 돕고 있는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의 신희석 법률분석관은 8일 VOA에, “정전협정과 제네바협약을 위반하고 국군포로를 송환하지 않은 북한 정권에 가장 큰 책임이 있지만, 한국 정부도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신희석 법률분석관] “한국 정부가 국군포로를 공식적으로 송환시킨 사례가 한 번도 없습니다. 북한과 협상이든, 아니면 다른 특수 작전을 통해서든 몇만 명이 되는 국군포로들 중에 우리 정부가 귀환시킨 분은 한 분도 안 계십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 정부가 전쟁 시기에도 이분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정전협정 체결 이후에도 이분들의 송환을 위해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 정부가 국군포로 실태를 제대로 조사한 적이 없으며 통계 역시 유엔사령부가 정전협정 당시 집계한 근거로 막연하게 그 수를 8만 2천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는 겁니다.

신 법률분석관은 전시 납북자의 경우, 정부 위원회에서 신고와 접수를 받아 북한 정권에 납치된 한국인 인원이 대략 10만 명에 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국군포로에 대해서도 정부가 적극적인 진상규명과 조사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국방부는 이에 대해 “북한이 국군포로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상황에서 관련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제한되는 상황”이라고 국방백서에서 짤막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아울러 ‘국군포로’란 표현 대신 “전쟁 시기와 그 이후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사람들에 대한 생사 확인 문제를 이산가족 문제에 포함해 해결”하기로 7차 남북적십자회담에서 합의한 뒤 2018년까지 상봉 행사 등을 통해 생사를 확인한 국군포로가 56명, 이 중 18명이 가족과 재회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봉과 확인 과정은 북한 정권이 국군포로들을 강제로 억류시킨 사실을 감추고 국군포로 스스로 자원해 북한에 남았다는 북한 당국의 논리를 홍보하는 것과 같다고 인권단체들은 비판합니다.

손명화 대표는 한국 정부의 소극적 대처로 국군포로 사안은 국민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졌고, 최근에는 국군포로들이 겪은 고통보다 전쟁 당시 북한군 반공포로들이 당한 인권 침해 또는 비전향장기수가 더 주목받는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손명화 대표] “국립 역사박물관의 남북한 전쟁포로 차별 전시 논란도 그렇고요.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뉴스에 나옵니다. 국군포로가 돌아가시면 뉴스는커녕 아무 데도 안 나옵니다.”

실제로 한국의 일부 주요 언론들은 7일 1969년 남파 간첩으로 활동하다 체포된 뒤 21년간 복역한 후 석방된 비전향장기수 오기태 씨의 사망 소식은 자세히 전했지만, 국군포로 우 모 씨 장례식이나 안장식 소식은 전하지 않았습니다.

손 대표는 “국가를 수호하다 수십 년의 고통을 겪은 국군포로의 장례식은 하객도 거의 없어 매우 쓸쓸할 때가 많다”며 “국방부 주무관 한 명이 나와 위로를 전할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VOA는 8일 한국 국방부에 국군포로 장례 지원 등 혜택 등에 대해 질문했지만, 답변을 받지 못했습니다.

신희석 법률분석관은 일부 국군포로 가족과 자녀가 정부 대신 유엔 강제실종실무그룹에 국군포로가 북한에서 겪은 인권 침해 진정서를 제출하는 상황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가 국군포로들에게 더 예우를 갖추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신희석 법률분석관] “국군포로에 대한 실태조사부터 시작하고, 현재 (한국에 귀환 국군포로) 60분이 돌아가시고 이제 20분이 남아 계시는데, 이분들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제대로 예우를 갖추고 모셔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