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0주년 특집] 한국전쟁 발발과 트루먼의 결정

트루먼 태통령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사저의 실내 모습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로 60주년을 맞았습니다.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지 5년 만에 발생한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양분 된 공산 진영과 자유 진영 간 대리전 성격을 띈 분쟁으로,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 축으로 하는 동서 간 냉전이 본격화 됐습니다. 미국은 북한 공산군의 불법 남침으로 시작해 3년 간 계속된 한국전쟁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고, 미국 외에도 전세계 15개국이 유엔의 깃발 아래 남한을 지원했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오늘부터 9회에 걸쳐 한국전쟁을 되돌아 보는 특집방송을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유미정 기자가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 편을 보내드립니다

1950년 6월 24일 미국 중서부 미주리 주의 작은 마을 인디펜던스. 미국의 제 33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주말 휴가를 보내기 위해 고향집에 내려와 있었습니다.

오후 늦게 고향집에 도착한 트루먼 대통령은 아내 베스, 외동딸 마가렛과 느지막히 저녁식사를 마치고, 조용한 주말 휴식을 고대하며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쳤습니다.

창 밖의 새 소리도, 뒷 뜰의 반딧불도 서서히 잦아들면서 녹음 짙은 미주리의 초여름 밤은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적막을 깨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밤 10시가 다 돼 걸려온 전화는 딘 애치슨 국무장관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각하, 중대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북한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했습니다.”

태평양 반대편 저 멀리 극동에 위치한 작은 나라. 제 2차 세계대전 말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군이 항복하면서, 5년 전 35년 간의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나라, 바로 그 나라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입니다.

1950년 6월25일, 평화롭던 일요일. 북한 공산 인민군은 새벽 4시 38선을 넘어 남한을 불법 침공했습니다. 38선 가까이에서 포성이 울려퍼지고, 소련제 탱크들의 캐더필러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면서, 유난히 길고도 무더웠던 그 해 6월 25일의 먼동이 터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에서는 융단폭격을 가하는 전투기의 굉음, 지상에서는 귀청을 멍멍하게 하는 대포와 기관총 소리. 2백 42대의 소련제 전차를 앞세운 북한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유엔이 임의로 책정한 경계선인 38선을 넘어 남한을 전면 침공했습니다.

전문가들은 한국전쟁 발발 이전부터 한반도에는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긴장이 고조돼 있었다고 말합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기록보관소 샘 루셰이 박사의 말입니다.

“1945년 38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민주주의의 미군이, 그리고 북쪽에는 공산주의의 소련 군정이 들어서면서 한반도는 이념적으로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48년 유엔 감시 하에 남한 만의 단독선거가 실시되고 그 결과 보수적인 이승만 대통령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유엔 감시 하의 총선거를 반대했던 소련은 김일성을 앞세워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별도의 정부를 수립합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의 레이 게셀브라하트 박사는 이처럼 이념적으로 갈라졌던 남북한 사이에는 전쟁 발발 이전부터 이미 수많은 ‘작은 전쟁’들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남북한은 모두 한반도가 자신들의 이념 하에 만들어진 단일 정부로 통일돼야 한다고 믿고 있었고, 그 때문에 38선 부근에서 충돌이 잦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비밀리에 남침을 위한 군사력 증강에 나섰습니다. 마이클 드바인 트루먼 도서관 관장은 구소련 붕괴 이후 기밀해제 된 소련 측 문서를 통해 한국전쟁이 북한에 의한 남침이란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증강했습니다. 또 김일성은 수 차례 조셉 스탈린을 만나 남침 계획을 승인하고 북한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을 우려해 이를 반대해왔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뀐 겁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 됐고, 소련은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으며, 또 김일성은 전쟁이 일어나면 남한 주민들이 인민군을 크게 환영할 것이라며 마침내 스탈린을 설득한 겁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남한은 군사적으로 절대 우위에 있던 북한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밀렸습니다.

당시 북한의 군사적 우위를 트루먼 도서관 기록문서보관소의 랜디 소웰 씨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북한은 2백 50여대의 탱크와 중야포, 중박격포로 무장했지만 남한은 이를 저지할 만한 수단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 중공군 출신 조선족 병사들은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난 중국의 국공내전에 참전해서 전투 경험까지 갖추고 북한으로 돌아가 북한군의 증강을 도왔습니다. ”

6월 25일. 트루먼 대통령은 서둘러 워싱턴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당일 오후 9시 국무장관과 국방장관, 합참의장 등이 참석하는 비상 각료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당시 신설된 합동참모본부의 초대 의장이었던 오마르 넬슨 브래들리 원수는 후일 당시의 긴급회의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많은 회의들이 잇따라 열렸는데요, 첫날 회의에서 남한군에 장비와 탄약 등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곧바로 이어 열린 추가 회의에서는 미군 보병 연대를 남한에 파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미국의 참전에 대한 트루먼 대통령의 결정은 단호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을 민주주의에 대한 공산주의의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단호히 저지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트루먼 대통령이 그 같은 결정을 즉시에 내렸고, 한번도 그 결정에 대해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1950년 7월 19일, 미국인들에게 한국전쟁 참전 결정의 배경을 설명했던 트루먼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입니다.

“남한은 미국에서 수 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나라지만, 그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중요합니다. 6월 25일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을 공격했습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독립 국가들을 정복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려 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북한의 남침은 유엔헌장 위반이고 평화를 침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도전에 정면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트루먼 대통령의 결정으로 참전한 미군은 3년 간 전사자와 부상자, 실종자 등을 포함해 모두 13만 여명이 희생됐습니다.

미주리 인디펜던스 노스 델라웨어 219 번지에 위치한 트루먼 대통령의 집. 전직 대통령의 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소박한 8천 평방 피트 남짓의 방 14개가 딸린 이 하얀 이층 집에는 한 해 3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옵니다.

1층 거실에 있는 벽난로 한쪽에는 참전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이승만 대통령이 선물한 도자기가 눈에 띕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생전 자신이 내린 결정 가운데 한국전쟁 참전이 가장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어린이) 대통령 시절 한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요? 트루먼 대통령) 오, 그것은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남한을 구한 것입니다.

한국전쟁 참전 결정으로 한 때 정치적 대가를 치러야 했던 트루먼 대통령. 하지만 60년이 지난 지금, 트루먼 대통령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했던 단호한 결정으로, 미국 역사에 작은 거인으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