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이 북한에 납북자 생사 확인을 추가로 요청했습니다. 모두 70년대에 납북된 한국인 12 명인데, 가족들 심정은 절박합니다. 백성원 기자가 납북자 가족들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해군 병장 정광모.
1970년 6월5일 납북 당시 제대를 3개월 앞둔 21살의 현역병이었습니다.
정 씨의 동생 정윤모 씨는 중학교 3학년 때 마지막으로 본 형의 멋진 제복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녹취: 정윤모 씨, 납북자 정광모 씨 동생] “6남매였는데 제가 다섯째고 형은 셋째였습니다. 저와 가까운 사이여서 제가 아주 좋아했고, 군대에서 휴가 나오면 굉장히 저한테 잘 해 주고, 형으로서.”
연좌제에 걸려들까 두려워 1996년에야 처음으로 한국 통일부에 납북자 신고를 했습니다.
그리고도 17년이 지나서야 정식으로 북한에 형의 생사 여부를 물을 수 있었습니다. 유엔 인권이사회 산하 ‘강제적.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WGEID)’이 북한에 전후 납북자 12 명의 생사 확인을 요청했고, 거기에 형의 이름이 포함됐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민간단체인 ‘북한인권시민연합’ 릴리언 리 캠페인팀 간사는 29일 ‘VOA’와의 전화통화에서 ‘WGEID’가 지난 11일 이런 사실을 알려왔다고 밝혔습니다.
[녹취: 릴리언 리 간사, 북한인권시민연합] “우리한테 편지가 왔어요. ‘북한인권시민연합’이 (명단을) 보냈으니까, 가족들에게 전달해 주라구요”.
12 명 모두 ‘북한인권시민연합’이 지난 해 9월부터 올해 9월까지 유엔에 명단을 제출했던 납북자들입니다.
2004년부터 지난 해까지 WGEID가 북한에 생사 확인을 요청한 납북자가 7 명에 불과한 걸 감안하면 이례적으로 많은 인원입니다.
‘북한인권시민연합’ 릴리언 리 간사는 최근 인권기구들의 관련 실태 조사와 납북자 가족들의 증언 등에 힘이 실리면서 이런 진전이 이뤄진 것으로 풀이했습니다.
[녹취: 릴리언 리 간사, 북한인권시민연합] “(북한인권시민연합이) 지난 3월에도 ‘강제적.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WGEID)’을 방문했고 증인들, 납북귀환자, 가족들 모두 거기서 증언을 한 게 다 영향을 준 것 같아요.”
릴리언 리 간사는 북한이 납북 사실 자체를 줄곧 부인해 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내년 3월 발표될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COI)의 북한 인권실태 조사보고서가 북한의 태도를 바꾸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북한에 생사 확인 요청을 하게 된 납북자 가족들 심정은 더욱 절박합니다.
정윤모 씨는 이제 60대 중반이 돼 있을 형의 이름만 불러도 눈물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정윤모 씨, 납북자 정광모 씨 동생] “형, 그동안 고생이 많았죠? 형, 말로 다 뭐라고 얘길 못 하겠네요.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그래도 앞으로 건강하게 같이 갑시다.”
1972년 동해 상에서 납북된 유풍호 선원 남정렬 씨에겐 7살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쉰 살을 바라보는 남장호 씨입니다.
[녹취: 남장호 씨, 납북자 남정렬 씨 아들]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지금까지 살아왔으니까 만나면 큰 소리로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죠. 속상합니다, 사실.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보고 싶습니다.”
남 씨는 지난 2000년 중국 내 브로커를 통해 아버지가 함경남도 함흥 비단리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고향 속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납치한 북한 당국에 할 말이 많습니다.
[녹취: 남장호 씨, 납북자 남정렬 씨 아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유해라도 좀 돌려주시고, 안 그러면 제사날이라도 알려줘야 저희가 정확하게 제사를 지내니까 그 거라도 꼭 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다행히 이번에 유엔이 북한에 생사 확인을 요청한 납북자 명단에 포함됐지만, 가족들은 40년을 기다렸습니다.
게다가 2004년부터 유엔에 생사 확인을 의뢰한 29 명 가운데 10 명의 명단은 아직도 북한 측에 넘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납북 경위에 대한 진상 규명은 물론 생사 확인까지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가족들은 평생 안고 살아온 멍에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VOA 뉴스 백성원 입니다.
해군 병장 정광모.
1970년 6월5일 납북 당시 제대를 3개월 앞둔 21살의 현역병이었습니다.
정 씨의 동생 정윤모 씨는 중학교 3학년 때 마지막으로 본 형의 멋진 제복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녹취: 정윤모 씨, 납북자 정광모 씨 동생] “6남매였는데 제가 다섯째고 형은 셋째였습니다. 저와 가까운 사이여서 제가 아주 좋아했고, 군대에서 휴가 나오면 굉장히 저한테 잘 해 주고, 형으로서.”
연좌제에 걸려들까 두려워 1996년에야 처음으로 한국 통일부에 납북자 신고를 했습니다.
그리고도 17년이 지나서야 정식으로 북한에 형의 생사 여부를 물을 수 있었습니다. 유엔 인권이사회 산하 ‘강제적.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WGEID)’이 북한에 전후 납북자 12 명의 생사 확인을 요청했고, 거기에 형의 이름이 포함됐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민간단체인 ‘북한인권시민연합’ 릴리언 리 캠페인팀 간사는 29일 ‘VOA’와의 전화통화에서 ‘WGEID’가 지난 11일 이런 사실을 알려왔다고 밝혔습니다.
[녹취: 릴리언 리 간사, 북한인권시민연합] “우리한테 편지가 왔어요. ‘북한인권시민연합’이 (명단을) 보냈으니까, 가족들에게 전달해 주라구요”.
12 명 모두 ‘북한인권시민연합’이 지난 해 9월부터 올해 9월까지 유엔에 명단을 제출했던 납북자들입니다.
2004년부터 지난 해까지 WGEID가 북한에 생사 확인을 요청한 납북자가 7 명에 불과한 걸 감안하면 이례적으로 많은 인원입니다.
‘북한인권시민연합’ 릴리언 리 간사는 최근 인권기구들의 관련 실태 조사와 납북자 가족들의 증언 등에 힘이 실리면서 이런 진전이 이뤄진 것으로 풀이했습니다.
[녹취: 릴리언 리 간사, 북한인권시민연합] “(북한인권시민연합이) 지난 3월에도 ‘강제적.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WGEID)’을 방문했고 증인들, 납북귀환자, 가족들 모두 거기서 증언을 한 게 다 영향을 준 것 같아요.”
릴리언 리 간사는 북한이 납북 사실 자체를 줄곧 부인해 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내년 3월 발표될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COI)의 북한 인권실태 조사보고서가 북한의 태도를 바꾸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북한에 생사 확인 요청을 하게 된 납북자 가족들 심정은 더욱 절박합니다.
정윤모 씨는 이제 60대 중반이 돼 있을 형의 이름만 불러도 눈물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정윤모 씨, 납북자 정광모 씨 동생] “형, 그동안 고생이 많았죠? 형, 말로 다 뭐라고 얘길 못 하겠네요.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그래도 앞으로 건강하게 같이 갑시다.”
1972년 동해 상에서 납북된 유풍호 선원 남정렬 씨에겐 7살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쉰 살을 바라보는 남장호 씨입니다.
[녹취: 남장호 씨, 납북자 남정렬 씨 아들]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지금까지 살아왔으니까 만나면 큰 소리로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죠. 속상합니다, 사실.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보고 싶습니다.”
남 씨는 지난 2000년 중국 내 브로커를 통해 아버지가 함경남도 함흥 비단리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고향 속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납치한 북한 당국에 할 말이 많습니다.
[녹취: 남장호 씨, 납북자 남정렬 씨 아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유해라도 좀 돌려주시고, 안 그러면 제사날이라도 알려줘야 저희가 정확하게 제사를 지내니까 그 거라도 꼭 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다행히 이번에 유엔이 북한에 생사 확인을 요청한 납북자 명단에 포함됐지만, 가족들은 40년을 기다렸습니다.
게다가 2004년부터 유엔에 생사 확인을 의뢰한 29 명 가운데 10 명의 명단은 아직도 북한 측에 넘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납북 경위에 대한 진상 규명은 물론 생사 확인까지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가족들은 평생 안고 살아온 멍에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VOA 뉴스 백성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