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이례적으로 미국 내 한인 이산가족의 유골 반출을 허용했습니다. 미국에 거주하는 동생은 수 십 년 동안 떨어져 산 누나의 흔적을 북한에서 직접 옮겨왔습니다. 백성원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6.25전쟁 때 서울에서 북한 인민군 협주단 가수로 차출됐던 박경재 씨.
유엔군이 서울을 다시 탈환한 뒤 북진하던 1951년 인민군에 이끌려 그대로 북한으로 넘어갔습니다.
이후 폴란드와 체코에서 성악을 전공한 뒤 북한 피바다가극단 전속 소프라노로 활동했던 박 씨는 미국에 거주하는 심장내과 전문의 박문재 박사의 누나입니다.
생사 여부 조차 모르고 지내던 남매는 지난 1995년 44년 만에 평양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미국의 공영 라디오 방송인 `PBS’가 남북한 이산가족의 사연을 주제로 한 기록영화를 제작하면서 북한 당국과 연결된 게 계기였습니다.
[녹취: 박문재 박사] “그 전까지는 누님이 전시에 폭격에 의해서 돌아가신 걸로 생각하고 누님도, 그 후에 얘길 하는데, 우리가 서울에서 폭격에 의해서 죽은 걸로 생각하고 단념하고 살아왔었습니다.”
미국에서 의사로 성공해 어려운 이들을 돌볼 수 있는 여유까지 생겼지만 18살 소녀로 기억되는 누나의 모습은 지울 수 없는 추억이자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혹시라도 누나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매년 재미 의사들과 평양으로 의료 봉사를 떠났던 박문재 박사는 마침내 누나와 재회하던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녹취: 박문재 박사] “평양 순안비행장에 내리자마자 비행기에서 내리니까 누님이 저 멀리서 저를 향해서 울면서 뛰어왔어요. 저도 알아보고 누님도 알아보고 서로 껴안고 울었습니다.”
60대가 돼서야 손을 맞잡은 남매는 이후 1년에 한 번씩 평양에서 만나 웃고 울었습니다.
부모님과 동생들 얘기, 청량리 인근에 묻어있는 학창시절의 추억, 수 십 년의 그리움을 나누기에 사흘 간의 만남은 매번 너무 짧았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상봉의 기쁨은 17년 만에 끝났습니다.
누나 박경재 씨가 재작년 80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녹취: 박문재 박사] “저는 누님을 만날 생각을 하고, 생존한 누님을 만날 생각을 하고 갔는데 도착해 보니까 4개월 전에 돌아가셨다고 소식을 들어서 제가 아주 정말 망연했었습니다. 그 때는”
미국 시카고에 묻힌 어머니 곁에 누나를 묻고 싶다는 생각은 그 때부터 들었습니다.
지난 2005년 91살 나이로 세상을 떠난 박 씨 남매의 어머니 지영자 씨는 마지막 순간까지 딸의 이름을 부르다 숨을 거뒀습니다.
박문재 박사는 10년 넘게 의료 봉사를 하며 인연을 맺은 북한 당국자들에게 올해 초 누나 유골의 일부라도 미국으로 옮기고 싶다는 소망을 조심스럽게 전달했습니다.
쉽지 않은 요청이었습니다.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는 북-일 유골 반환 협상처럼 국가 차원의 과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뜻밖에도 정성스레 준비한 유골함을 들고 지난 3일 방북한 박문재 박사에게 유골 반출을 허가했습니다.
[녹취: 박문재 박사] “누님의 유골을 가져옴으로써 어머니 곁에 묻음으로써 누님과 어머니가 같이 영구히 있을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됐고, 저도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옆에 묻혀서 재로서도 우리 가족이 재상봉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다행으로 생각하고 이런 비극이 우리나라에서 생기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박문재 박사는 지난 10일 평양 만수대 인근 공동묘지에 묻혀있던 누나의 유골 일부를 북한에서 미국으로 직접 옮겨왔습니다.
북한에 살고 있는 누나의 가족으로부터 양해를 얻어 절반 가량의 유골만 얻었습니다.
여동생과 함께 누나의 유골을 시카고에 있는 어머니 묘지 옆에 나란히 묻을 계획인 80살의 동생은,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VOA 뉴스 백성원 입니다.
6.25전쟁 때 서울에서 북한 인민군 협주단 가수로 차출됐던 박경재 씨.
유엔군이 서울을 다시 탈환한 뒤 북진하던 1951년 인민군에 이끌려 그대로 북한으로 넘어갔습니다.
이후 폴란드와 체코에서 성악을 전공한 뒤 북한 피바다가극단 전속 소프라노로 활동했던 박 씨는 미국에 거주하는 심장내과 전문의 박문재 박사의 누나입니다.
생사 여부 조차 모르고 지내던 남매는 지난 1995년 44년 만에 평양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미국의 공영 라디오 방송인 `PBS’가 남북한 이산가족의 사연을 주제로 한 기록영화를 제작하면서 북한 당국과 연결된 게 계기였습니다.
[녹취: 박문재 박사] “그 전까지는 누님이 전시에 폭격에 의해서 돌아가신 걸로 생각하고 누님도, 그 후에 얘길 하는데, 우리가 서울에서 폭격에 의해서 죽은 걸로 생각하고 단념하고 살아왔었습니다.”
미국에서 의사로 성공해 어려운 이들을 돌볼 수 있는 여유까지 생겼지만 18살 소녀로 기억되는 누나의 모습은 지울 수 없는 추억이자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혹시라도 누나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매년 재미 의사들과 평양으로 의료 봉사를 떠났던 박문재 박사는 마침내 누나와 재회하던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녹취: 박문재 박사] “평양 순안비행장에 내리자마자 비행기에서 내리니까 누님이 저 멀리서 저를 향해서 울면서 뛰어왔어요. 저도 알아보고 누님도 알아보고 서로 껴안고 울었습니다.”
60대가 돼서야 손을 맞잡은 남매는 이후 1년에 한 번씩 평양에서 만나 웃고 울었습니다.
부모님과 동생들 얘기, 청량리 인근에 묻어있는 학창시절의 추억, 수 십 년의 그리움을 나누기에 사흘 간의 만남은 매번 너무 짧았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상봉의 기쁨은 17년 만에 끝났습니다.
누나 박경재 씨가 재작년 80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녹취: 박문재 박사] “저는 누님을 만날 생각을 하고, 생존한 누님을 만날 생각을 하고 갔는데 도착해 보니까 4개월 전에 돌아가셨다고 소식을 들어서 제가 아주 정말 망연했었습니다. 그 때는”
미국 시카고에 묻힌 어머니 곁에 누나를 묻고 싶다는 생각은 그 때부터 들었습니다.
지난 2005년 91살 나이로 세상을 떠난 박 씨 남매의 어머니 지영자 씨는 마지막 순간까지 딸의 이름을 부르다 숨을 거뒀습니다.
박문재 박사는 10년 넘게 의료 봉사를 하며 인연을 맺은 북한 당국자들에게 올해 초 누나 유골의 일부라도 미국으로 옮기고 싶다는 소망을 조심스럽게 전달했습니다.
쉽지 않은 요청이었습니다.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는 북-일 유골 반환 협상처럼 국가 차원의 과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뜻밖에도 정성스레 준비한 유골함을 들고 지난 3일 방북한 박문재 박사에게 유골 반출을 허가했습니다.
[녹취: 박문재 박사] “누님의 유골을 가져옴으로써 어머니 곁에 묻음으로써 누님과 어머니가 같이 영구히 있을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됐고, 저도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옆에 묻혀서 재로서도 우리 가족이 재상봉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다행으로 생각하고 이런 비극이 우리나라에서 생기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박문재 박사는 지난 10일 평양 만수대 인근 공동묘지에 묻혀있던 누나의 유골 일부를 북한에서 미국으로 직접 옮겨왔습니다.
북한에 살고 있는 누나의 가족으로부터 양해를 얻어 절반 가량의 유골만 얻었습니다.
여동생과 함께 누나의 유골을 시카고에 있는 어머니 묘지 옆에 나란히 묻을 계획인 80살의 동생은,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VOA 뉴스 백성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