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의 탈북 여대생이 북한의 장마당 세대가 북한의 희망이란 글을 미 유력지 '워싱턴포스트' 신문에 기고해 관심을 끌었습니다. 주인공은 지난 2007년 탈북해 현재 동국대학교에 재학 중인 박연미 씨인데요. 박 씨는 정부의 혜택을 거의 받지 않고 장마당을 통해 자란 신세대들이 북한 변화의 동력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자신도 장마당 세대인 박 씨는 한국의 인터넷 방송인 ‘프리덤 팩토리 -자유공장’에서 영어로 북한사회를 소개하는 ‘케이시 앤 연미’ 쇼를 공동 진행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26일 박연미 씨를 전화로 인터뷰했습니다.
기자) 어떤 계기로 워싱턴 포스트에 ‘장마당 세대’에 관한 글을 기고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셨습니까?
박연미) 제가 기고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북한에서 (한국에) 처음에 와서 다른 분들의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북한이 아닌 고난의 행군 시절의 북한으로 대개 알고 계시더라고요. 여기 있는 분들은 옛날의 북한 밖에 모르셔서, 요즘의 북한을 바라볼 수 있는 다양한 시각을 전달해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지금 북한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장마당을 통해 북한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젊은 저 같은 세대 같은 경우에도, 너무도 다른 북한을 보고 왔습니다. 장마당세대를 통해서 북한의 미래를 예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다양한 북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기자) 장마당 세대의 특징을 3가지로 분류하셨는데, 아무래도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정권에 대한 충성도가 전 세대와 같지 않다는 지적 같습니다.
박연미) 네 이전과는 다르죠.
기자) 실제로 세뇌교육을 받긴 했지만, 그런 우상화 교육이 장마당 세대에는 잘 적용되지 않고 있다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박연미) 전혀 효과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저는 특이한 가정환경 때문에 평양을 포함하여 북한 안에서 많이 이사를 다녔습니다. 아무래도 지역에 따라서 충성도가 다른 것은 있습니다. 특히 국경 쪽은 거의 충성도가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탈북을 하고 나서도 김정일에 대해서 욕을 한다던가 이런 것에 대해서 굉장히 두려워 했습니다. 부모님 세대는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존경했는데, 저희 세대에는 존경이나 당에 대한 충성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저희 세대에는 공포만 남아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그런 것들이 생활에 전혀 영향을 안 미쳤고, 김일성 정권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면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습니다. 부모님 세대가 (사상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기자) 북한 정권이 과거처럼 주민들에게 배급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정부에 대한 존중이 없었다는 얘긴가요?
박연미) 그렇죠. 한국에 와서 당황했던 것이, “북한에서 사회주의 생활양식으로 살아온 사람이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는 게 힘들죠?” 라고 말하며 자본주의를 부각해서 말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도 사실상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쌀 한 톨도 공짜로 국가에서 받아본 것도 없고, 부모님이 장사를 하시며 돈을 벌어서 시장의 원리로 살아왔습니다.
기자) 북한에서는 이미 장마당을 통해서 초기형태지만 시장경제를 체험하고 왔기 때문에, 한국의 시장경제 체제에도 익숙하고 적응하기가 어렵지 않았다는 얘기군요? (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장마당에 갔던 기억이 생생하시겠네요?
박연미) 어릴 때 장마당에서 방학에 감도 직접 팔아보고, 이자를 받아보고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하는지, 어떻게 수입을 창출하는지도 배웠죠.
기자) 앞서 북한 정권의 공포정치를 말씀하셨는데, 그런 장마당이 너무 커지는 것에 대해서 북한 당국이 적지 않게 우려하고 있고 통제도 강화됐다는 지적도 있는데, 주민들이나 친구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박연미) 불만이 너무 컸습니다. 우리도 중국처럼 빨리 개방을 해야 한다. 세계가 다 이렇게 열려있는데, 개방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살 길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무줄도 너무 당기면 나중에는 못 버티고 끊어지듯이 북한도 너무 팽팽하게 당겨져서 끊어질 수 밖에 없다고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기자) 공포정치때문에 불만을 표출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마음 속으로는 불만이 적지 않다는 얘긴가요?
박연미 양)네, 그렇습니다. 날이 갈수록 어른들이 모여 앉으면 김정일과 정권을 욕했습니다.
기자) 장마당 세대가 최근 몇 년 전부터 군대에 입대하는데, 뉴스를 보면 최근에 군대기강이 해이해지고 충성도가 많이 약화됐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장마당세대의 성향과 연관이 있는 걸까요?
박연미) 너무 큽니다. 그런 학생들이 군대에 가기 전에 한국 드라마를 다 보고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잘 사는 지 다 보게 됩니다. 장마당을 통해서 장사에 눈이 뜨였는데, 군대를 가서 10년이란 세월을 보내야 하고, 장군님을 위해 총.폭탄이 돼야 한다고 교육하면 당연히 세뇌가 안되죠. 이미 자본주의가 어떤 것인지 눈이 뜨인 상태인데, 다시 눈을 감게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이지요.
기자) 전문가들은 이런 새로운 장마당 세대의 출현이 앞으로 북한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에 대해 여러 진단을 하며 다양한 전망도 하고 있습니다. 연미 시는 앞으로 장마당 세대가 북한 사회에 미칠 영향력에 대해서 어떻게 보십니까?
박연미) 이 세대가 북한 안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나이도 너무 적고, 군대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영향력을 미치긴 힘들지만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잠재력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끝으로 북한에 있는 장마당 세대 친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십니까?
박연미) ‘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라고 말하고 싶은데요. 북한의 독재가 영원할 것 같지만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영원한 것은 없었잖아요. 독일의 나찌 정권이나 소련의 공산주의 정권도 영원할 것 같았지만, 무너졌습니다. 저는 그 친구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독재도 앞으로 무너질 날이 올 것이고, 그 날이 점점 앞당겨지고 있는 것을 저는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어 살아있어 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너무 인권유린이 심한 나라여서 그 날까지 살아만 있어 달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기자) 어떤 계기로 워싱턴 포스트에 ‘장마당 세대’에 관한 글을 기고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셨습니까?
박연미) 제가 기고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북한에서 (한국에) 처음에 와서 다른 분들의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북한이 아닌 고난의 행군 시절의 북한으로 대개 알고 계시더라고요. 여기 있는 분들은 옛날의 북한 밖에 모르셔서, 요즘의 북한을 바라볼 수 있는 다양한 시각을 전달해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지금 북한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장마당을 통해 북한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젊은 저 같은 세대 같은 경우에도, 너무도 다른 북한을 보고 왔습니다. 장마당세대를 통해서 북한의 미래를 예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다양한 북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기자) 장마당 세대의 특징을 3가지로 분류하셨는데, 아무래도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정권에 대한 충성도가 전 세대와 같지 않다는 지적 같습니다.
박연미) 네 이전과는 다르죠.
기자) 실제로 세뇌교육을 받긴 했지만, 그런 우상화 교육이 장마당 세대에는 잘 적용되지 않고 있다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박연미) 전혀 효과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저는 특이한 가정환경 때문에 평양을 포함하여 북한 안에서 많이 이사를 다녔습니다. 아무래도 지역에 따라서 충성도가 다른 것은 있습니다. 특히 국경 쪽은 거의 충성도가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탈북을 하고 나서도 김정일에 대해서 욕을 한다던가 이런 것에 대해서 굉장히 두려워 했습니다. 부모님 세대는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존경했는데, 저희 세대에는 존경이나 당에 대한 충성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저희 세대에는 공포만 남아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그런 것들이 생활에 전혀 영향을 안 미쳤고, 김일성 정권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면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습니다. 부모님 세대가 (사상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기자) 북한 정권이 과거처럼 주민들에게 배급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정부에 대한 존중이 없었다는 얘긴가요?
박연미) 그렇죠. 한국에 와서 당황했던 것이, “북한에서 사회주의 생활양식으로 살아온 사람이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는 게 힘들죠?” 라고 말하며 자본주의를 부각해서 말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도 사실상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쌀 한 톨도 공짜로 국가에서 받아본 것도 없고, 부모님이 장사를 하시며 돈을 벌어서 시장의 원리로 살아왔습니다.
기자) 북한에서는 이미 장마당을 통해서 초기형태지만 시장경제를 체험하고 왔기 때문에, 한국의 시장경제 체제에도 익숙하고 적응하기가 어렵지 않았다는 얘기군요? (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장마당에 갔던 기억이 생생하시겠네요?
박연미) 어릴 때 장마당에서 방학에 감도 직접 팔아보고, 이자를 받아보고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하는지, 어떻게 수입을 창출하는지도 배웠죠.
기자) 앞서 북한 정권의 공포정치를 말씀하셨는데, 그런 장마당이 너무 커지는 것에 대해서 북한 당국이 적지 않게 우려하고 있고 통제도 강화됐다는 지적도 있는데, 주민들이나 친구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박연미) 불만이 너무 컸습니다. 우리도 중국처럼 빨리 개방을 해야 한다. 세계가 다 이렇게 열려있는데, 개방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살 길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무줄도 너무 당기면 나중에는 못 버티고 끊어지듯이 북한도 너무 팽팽하게 당겨져서 끊어질 수 밖에 없다고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기자) 공포정치때문에 불만을 표출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마음 속으로는 불만이 적지 않다는 얘긴가요?
박연미 양)네, 그렇습니다. 날이 갈수록 어른들이 모여 앉으면 김정일과 정권을 욕했습니다.
기자) 장마당 세대가 최근 몇 년 전부터 군대에 입대하는데, 뉴스를 보면 최근에 군대기강이 해이해지고 충성도가 많이 약화됐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장마당세대의 성향과 연관이 있는 걸까요?
박연미) 너무 큽니다. 그런 학생들이 군대에 가기 전에 한국 드라마를 다 보고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잘 사는 지 다 보게 됩니다. 장마당을 통해서 장사에 눈이 뜨였는데, 군대를 가서 10년이란 세월을 보내야 하고, 장군님을 위해 총.폭탄이 돼야 한다고 교육하면 당연히 세뇌가 안되죠. 이미 자본주의가 어떤 것인지 눈이 뜨인 상태인데, 다시 눈을 감게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이지요.
기자) 전문가들은 이런 새로운 장마당 세대의 출현이 앞으로 북한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에 대해 여러 진단을 하며 다양한 전망도 하고 있습니다. 연미 시는 앞으로 장마당 세대가 북한 사회에 미칠 영향력에 대해서 어떻게 보십니까?
박연미) 이 세대가 북한 안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나이도 너무 적고, 군대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영향력을 미치긴 힘들지만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잠재력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끝으로 북한에 있는 장마당 세대 친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십니까?
박연미) ‘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라고 말하고 싶은데요. 북한의 독재가 영원할 것 같지만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영원한 것은 없었잖아요. 독일의 나찌 정권이나 소련의 공산주의 정권도 영원할 것 같았지만, 무너졌습니다. 저는 그 친구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독재도 앞으로 무너질 날이 올 것이고, 그 날이 점점 앞당겨지고 있는 것을 저는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어 살아있어 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너무 인권유린이 심한 나라여서 그 날까지 살아만 있어 달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