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북한에서 체포됐던 네덜란드 우표수집상이 그동안 부분적으로만 공개됐던 억류 당시의 전모를 구체적으로 밝혔습니다. 북한에 사무실을 두고 13년 동안 24 차례 방북했던 빌렘 판 데어 베일 씨는 지난 24일 ‘VOA’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북한 억류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구글 위성지도를 통해 평양 내 외국인 구금시설의 위치를 정확히 지목했습니다. 또 현지에서 감시인과 동행한 적이 없었는데도 자신의 말과 행적이 보위부 기록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을 심문 과정에서 확인했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에서 1천70여 점의 선전포스터를 수집한 판 데어 베일 씨는 네덜란드의 한 대학과 협력해 이를 북한사회 연구자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판 데어 베일 씨를 백성원 기자가 인터뷰했습니다.
기자) 어떤 계기로 북한의 선전포스터와 우표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까?
판 데어 베일) 저는 40년 동안 전세계 우표를 수집하고 거래해 왔고 특히 사회주의 국가들이 제작한 포스터의 단순명료함을 좋아합니다. 오래 전 독일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북한 당국자를 처음 만나 친구가 됐습니다. 그 뒤 이탈리아 밀라노 전시회에서 북한 우표를 대량 구입했는데, 북한 당국이 즉시 초대 의사를 전해 오더군요. 그 때는 거절했지만 결국 앞서 언급한 북한 친구와 몇 달 뒤 베이징에서 만나 함께 기차로 평양에 들어갔습니다. 그게 1998년이었습니다. 8일을 머물렀고 그 때만해도 북한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지만 이후 수 십 차례 방북을 계속하게 됐습니다. 18살 생일을 맞은 제 아들까지 데려갔으니까요.
기자) 굉장히 드문 경우인데, 북한에 사무실까지 여셨죠?
판 데어 베일) 2004년 북한 친구의 제안으로 평양에서 20km 떨어진 평성에 사무실을 열었습니다. 그가 매니저 역할을 하면서 북한 각지에서 그림, 포스터, 우표를 모아 왔죠. 하지만 제가 평성에 머무는 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2011년 북한 당국에 체포될 때까지 매년 1만 달러 정도를 임금 명목으로 지불했습니다.
기자) 북한 측으로서는 그런 물품을 외부에 판매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거군요.
판 데어 베일) 그렇습니다. 특히 저와 제 친구가 2004년 네덜란드에서 크게 개최한 북한 포스터 전시회가 ‘타임’지 등 주요 언론에 대대적으로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그 뒤 북한에 들어가자 많은 북한 관리들이 저를 갑자기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예술을 외부에 소개할 수 있는 적임자로 본 겁니다. 저는 북한에서 많을 때는 80~100점의 포스터를 들고 나왔습니다. 판매용이 아니라 전부 개인 수집 차원이었죠.
기자) 북한 포스터에 어떤 매력을 느낀 겁니까?
판 데어 베일) 북한 당국도 그들의 포스터에 관심을 갖는 저를 보고 놀라더군요. 북한은 풍경화 등 일반 예술작품을 일본이나 심지어 한국에도 팔지만, 제가 정치적 내용을 담은 포스터를 수집하는 게 의아했던 거죠. 하지만 제가 수집한 1952년부터 2011년 사이의 북한 포스터야말로 그들 역사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그린 그림은 내일도 그릴 수 있지만, 포스터의 경우는 그렇지 않거든요. 훨씬 독특함을 갖게 되는 겁니다. 사실 북한 포스터들을 수집할 당시만 해도 그런 생각까진 못했어요.
기자) 13년 동안 이어진 북한 방문 얘길 좀 해 보겠습니다. 당시 감시가 얼마나 심했습니까?
판 데어 베일) 평소엔 제가 감시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못 느꼈습니다. 하지만 2011년 체포된 뒤 조사를 받으면서 그동안 제 말과 행동이 날짜 별로 모두 기록돼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가령 제가 “당신은 이런 나라에서 더 살고 싶겠는가”라고 2005년 4월 몇 일 말했지 않느냐고 심문하더군요. 말 조심을 해야 하는 호텔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누군가에게 실제로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거든요. 그걸 어떻게 기록해 놨는지 모르겠습니다. 북한 당국은 정말 저에 대한 많은 기록을 갖고 있었습니다.
기자) 정확한 억류 날짜는 언제였죠?
판 데어 베일) 2011년 7월29일 체포돼 8월13일 풀려났습니다. 8월9일이 제 생일이었으니까 60살 생일을 감금된 채 보낸 거죠. 실제 감옥이 아니라 일종의 구금시설이었는데, 침대와 책상이 하나씩 놓여 있고 화장실이 딸린 방이었습니다. 네 명의 인민군 병사가 24시간 저를 감시했기 때문에 한 밤 중에 잠을 깨도 북한 군인의 얼굴과 마주쳤습니다.
기자) 평양 지리에 익숙하시니까 혹시 억류 장소가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 있지 않으세요?
판 데어 베일)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습니다. 석방되기 하루 전 비자 때문에 평양주재 중국대사관을 들렀는데요. 차창 밖을 볼 수 없도록 고개를 푹 숙이라고 했지만 차가 큰 길가로 나오자 얼굴을 들 수 있었는데 잘 아는 곳이었습니다. 나중에 네덜란드로 돌아와서 구글 위성지도를 통해 정확히 어떤 건물에 억류돼 있었는지 찾아냈습니다. 억류 당시 통역 관리에게 2009년 억류됐던 미국인 여기자 2명도 이 곳에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깜짝 놀라면서 여기자 얘기를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하더군요. 그가 대답을 해 주진 않았지만 같은 장소임을 확신합니다.
기자) 심문 당시 어떤 질문을 하던가요?
판 데어 베일) 저에 대한 모든 걸 물어봤습니다. 처음으로 다닌 학교며 제 아버지 직업은 뭐였는지 등을 묻다가 대뜸 지난해 묘향산에 가서 뭘 했는지 질문하는 등 모든 게 뒤섞여 있었습니다. 심지어 오래 전 네덜란드를 방문했던 스위스 베른 주재 북한대사와 식사하면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물어보더군요. 매일 16시간씩 의자에 앉아 2~3차례 심문 받는 날이 이어졌기 때문에 잠은 잘 왔는데, 정신이 완전히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기자) 북한 당국이 억류 이유를 알려줬습니까?
판 데어 베일) 공식적인 이유는 스파이 혐의와 북한인들에게 탈북을 권한 혐의였습니다. 모두 15년 형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들입니다. 두 혐의 모두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인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북한 보위부는 제가 북한인들과 나눈 모든 대화를 매우 궁금해 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스위스 베른 주재 북한대사도 저와 만났던 정황을 이미 제출했는데, 제 증언과 차이가 나면 그에게도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체포되기 직전 제 현지 사무실 문도 닫았기 때문에 북한 당국으로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저를 심문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라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기자) 심문 도중 가혹 행위를 당한 적은 없습니까?
판 데어 베일) 그런 적은 없습니다. 억류 기간 내내 쌀밥만 먹었는데 몇 일 지나니까 냄새도 맡기 싫어질 정도였습니다. 석방 하루 전 처음으로 커피를 권해서 2주일 만에 커피 맛을 봤던 기억이 나네요.
기자) 석방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당히 불안했겠군요.
판 데어 베일) 고려항공이 일주일에 두 차례 운항하니까 해당 요일이 다가올 때마다 이젠 석방해 주려나 기대했죠. 제 생일이었던 8월9일 풀려나지 않을까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8월10일 수요일 저의 모든 잘못을 인정한다고 명시한 서류에 서명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심문은 훨씬 덜 까다롭게 진행돼 이제 거의 끝났구나 생각했습니다. 다음날인 금요일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에 다녀온 뒤 석방을 거의 확신했습니다. 그러자 북한 관리가 그날 저녁 방문할 판사의 판결에 달린 문제라며 괜한 희망을 갖지 말라고 해서 그 때 처음으로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기자) 하지만 다음날 북한을 떠날 수 있었던 거죠?
판 데어 베일) 예. 먼저 북한 관리가 제게 판사의 판결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두 가지 시나리오를 알려줬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 그리고 아픈 아내와 두 명의 자녀가 있다고 간청해 보라고 했습니다. 또 석방 판결을 대비한 대답도 따로 준비해 줬고요. 오후 7시30분쯤 판사가 저를 방문해 제 카메라와 컴퓨터를 압수했고 다음날 출국을 승인했습니다. 평양 공항에서 휴대전화를 찾아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당국자들이 따라 나와 인사를 나눴습니다. 이상한 상황이었죠. 그들이 결정을 번복하지 않을까 극도의 불안감 속에 평양을 떠났고 베이징에 도착하자 기쁨의 눈물이 터졌습니다.
기자) 북한 당국이 숙박료 명목으로 몸값 지불을 요구하진 않았나요?
판 데어 베일) 아니오. 모든 돈을 돌려받았습니다. 저는 비자 수속 비용과 당뇨병 약값을 지불했고 식대로 220 유로를 냈을 뿐입니다. 억류 기간 동안 북한 당국은 중국을 통해 당뇨약을 제공해 줬습니다.
기자) 그동안 수집한 수많은 북한 포스터가 연구자료로 활용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판 데어 베일) 네덜란드 라이덴대학의 한 교수가 제 포스터들을 시대별로 정리해 북한 역사와 관련한 추가 정보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모든 포스터를 복사해 그 안에 담긴 이미지와 문구를 분석하는 중이죠. 포스터들은 특히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 북한 역사와 사회의 잘 알려지지 않은 단면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1958년 북한에서 천리마운동이 어떤 식으로 시작됐고 홍보됐는지 포스터에 잘 묘사돼 있습니다.
기자) 혹시 북한을 다시 방문하고 싶은 생각이 드십니까?
판 데어 베일) 복잡한 문제입니다. 저와 같은 방식으로 북한을 왕래한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겁니다. 중간에 뭔가 잘못되긴 했지만요. 저는 북한을 24번 방문하면서 단 한번도 감시인과 동행한 적이 없습니다. 현지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인 겁니다. 만약 그런 조건으로 다시 방북할 수 있다면 내일 아침에라도 가고 싶지만 이제 그럴 수 없고, 다시 간다 해도 감시인들이 따라붙고 친구들도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체제가 무너진다면 누구보다도 먼저 북한에 가서 친구들을 찾고 싶습니다.
지난 2011년 북한에서 체포됐던 네덜란드인 빌렘 판 베어 데일 씨로부터 북한 당국과의 상업 거래와 억류 상황을 자세히 들어봤습니다. 대담에 백성원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