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쿠바가 54년 만에 수교를 재개한 가운데 쿠바의 변화가 북한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점검하는 토론회가 미국에서 열렸습니다. 같은 공산국가지만 외부와의 교류와 주민들의 의식 수준에서 큰 격차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보도합니다.
워싱턴 인근 메릴랜드 주에 본부를 둔 쿠바경제연구학회 (ASCE)가 지난주 미 남부 마이애미에서 총회를 열었습니다.
마이애미는 쿠바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울 뿐아니라 1백 20만여 명의 쿠바 이민자들이 살고 있는 미-쿠바 관계의 상징적 도시입니다.
이번 총회 프로그램 가운데는 특히 북한과 쿠바의 체제 전환을 비교하는 토론회가 포함돼 관심을 끌었습니다.
쿠바경제연구학회의 카를로스 실리 회장은 5일 ‘VOA’에 보낸 이메일에서 한국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의 제의로 토론회를 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쿠바와 북한의 체제, 당과 군대의 역할, 주변국과의 관계 등을 비교하며 전문가들이 의견을 교환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토론회를 진행한 최진욱 통일연구원장은 6일 ‘VOA’에, 미국과의 대결 구도에서 협력 구도로 전환 중인 쿠바가 북한에 시사하는 게 무엇인지 점검하는 게 목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최진욱 원장] “북한의 경우 미국과 수교 문제도 안 되고 핵 문제도 어려워지고 북한 자체가 더 고립으로 가고 있고 북한 내부 체제도 경직돼 있고 화해 협력보다 대결 국면이 지속되는 게 안타까운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 상황을 어떻게 하면 개선하고 쿠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뭔가? 또 미국이 어떤 조건에서 쿠바와 수교 결정을 했고 쿠바는 어떤 조건 하에서 개방을 결정했는지에 대한 관심이 1차적이고 또 그 것을 알기 위한 국제정세, 쿠바와 북한의 실태 비교연구 등 이런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북한과 쿠바는 모두 1990년대 옛 소련 붕괴 후 정치적, 경제적 위기를 겪었습니다. 특히 미국의 강력한 경제 제재 속에 전체주의 체제를 고수하면서도 암시장이나 장마당 등 일부 시장경제 체제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라 안팎의 환경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공통점 보다 차이가 훨씬 크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미 외교관 출신인 게리 메이바덕 박사는 6일 ‘VOA’에 쿠바와 미국의 관계 개선이 남북 관계나 북한의 대외관계에 유익한 본보기가 되기는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메이바덕 박사] “I don’t think Cuba-US relationship is today a good model for North-South Korea….”
북한은 쿠바와 달리 김 씨 가족이 세습하는 `왕정체제'로 미국과 한국에 여전히 강력한 적대정책을 펴고 있지만 쿠바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메이바덕 박사는 쿠바 역시 피델 카스트로 집권 시절에는 미국에 대한 증오가 팽배해 쿠바에 대한 역대 미 정부의 지속적인 관계 개선 노력이 모두 실패했다고 지적했습니다. 피델이 물러나고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 현 국가평의회 의장이 권력을 이양한 뒤에야 관계 개선의 틈새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특히 지속적인 경제 위기로 암시장이 성행하면서 정부에 대한 쿠바인들의 신뢰와 의존도가 약화된 현상도 미국과 쿠바의 관계 개선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입니다.
메이바덕 박사는 쿠바 국민들의 인식이 바뀐 데는 쿠바계 미국 이민자들의 송금과 모국 방문이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습니다.
[녹취: 메이바덕 박사] “The remittance is very important because it makes…”
180만 명에 달하는 미국 내 쿠바 이민자들이 해마다 쿠바의 가족들에게 보내는 송금 규모가 수 십 억 달러에 달하고 쿠바 주민들은 이 돈으로 장사를 해 자립도가 높아졌다는 겁니다. 게다가 미국 내 쿠바 이민자들의 모국 방문이 크게 늘면서 쿠바 주민들의 의식이 깨어 변화에 대한 갈망이 더 높아졌다고 메이바덕 박사는 지적했습니다.
북한은 해외에 망명한 탈북민 규모가 3만여 명에 불과해 송금 규모가 적을 뿐아니라 모국 방문조차 불가능하다는 현실이 대조적입니다.
마이애미 토론회 뒤 이달 초 류길재 전 통일부 장관 등과 쿠바를 방문한 최진욱 원장은 개방 차원에서 북한과 쿠바는 확연히 다른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최진욱 원장] “쿠바는 비행기가 거의 안 가는 나라가 없을 정도로 많더라구요. 비행기 노선이. 북한은 사실상 북경 노선 하나 밖에 없지요. 어떻게 보면 섬은 쿠바가 아니라 북한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쿠바가 섬인데 북한이 섬처럼 느껴졌죠. 쿠바는 체제 내부 문제보다는 개방이 이미 돼있기 때문에 관광산업 등을 충분히 개발할 여지가 많고 유통업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너무 폐쇄돼 있기 때문에 개방 자체가 더 급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쿠바를 방문한 외국인은 3백만 명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습니다. 특히 쿠바가 이를 통해 벌어들이는 관광 수익은 해마다 26억 달러에 달합니다. 이는 중국인을 제외한 외국인 관광객이 한 해 수 천 명에 불과한 북한과 비교 자체가 힘들 정도로 큰 격차입니다.
두 나라가 전체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통치구조는 명확히 다르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한국 숭실대학교의 이정철 교수는 토론회에서 쿠바와 북한의 다른 통치구조가 개방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쿠바경제연구학회 자료에 따르면 이 교수는 쿠바의 경우 군부가 경제 등 전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지만 북한은 당이 강력한 사상으로 군부를 통제하며 기능적으로 역할을 분담하는 차이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최진욱 통일연구원장은 이런 배경이 변화를 위한 쿠바의 결단을 앞당겼다는 지적이 토론회에서 제기됐다고 설명했습니다.
[녹취: 최진욱 원장] “차이점은 북한 군부는 때에 따라 당의 결정으로 군부의 이익이 침해될 수 있습니다. 반면 쿠바 군부는 자신들의 결정이 자신들의 이익과 일치해야 하니까 다시 말해 결정이 쉽다는 얘기죠. 따라서 어떤 상황에도 쿠바 군부는 자신들에게 손해 보는 결정을 하지 않는 것이고 북한은 군부에 피해가 갈 수도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쿠바의 개혁개방이 쉬울 수 있었다는 관점입니다.”
이와 관련해 토론회에 참석한 레리 배커 미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PSU) 교수는 자신의 웹 블로그에서 쿠바가 ‘집정관적 마르크스주의’(Praetorian Marxism) 형태로 나아가고 있는 반면 북한은 ‘왕조적 마르크스주의’(Monarchical Marxism) 를 지향하고 있어 방향이 다르다고 풀이했습니다.
쿠바는 군부가 조직적. 이념적으로 국가를 통치하지만 북한은 김 씨 일가의 통치 속에 군부는 엄격한 이념적 당 규율을 바탕으로 안보 등 제한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북한이 수령을 신적 존재로 숭배하는 신정국가이기 때문에 개혁개방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펴왔습니다. 개혁은 과거의 실책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데, 잘못을 시인하는 것은 수령이 완벽하다는 유일영도체계와 김 씨 가족의 지배체계에 모두 배치되기 때문에 개혁이 어렵다는 겁니다.
쿠바경제연구학회 게리 메이바덕 박사는 쿠바 군부가 그런 세습독재의 걸림돌이 없는 게 다행이지만 고민도 적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녹취: 메이바덕 박사] “There is no sense of dynastic transition so that makes it somewhat easier to believe….”
쿠바는 2018년에 라울 카스트로 의장이 권좌에서 물러나기 때문에 세습 우려가 없을 뿐아니라 국민들 역시 정치에 무관심 해 당장 위협 요소는 적지만 지속적인 개방이 정권에 심각한 위협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군 엘리트에 팽배해 있다는 겁니다.
메이하덕 박사는 그러나 든든한 후원자였던 베네수엘라의 경제 위기 여파를 극복하고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쿠바 정부가 당분간 경제성장에 집중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최진욱 원장은 북한 역시 든든한 후원자였던 중국과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경제가 더 악화되는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다며, 쿠바를 본보기로 과감한 변화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