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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GDP 3만배 증가...축구 대표팀 동아시안컵 우승 '금의환향'


광복 70주년을 맞아 부산 영화의 전당 빅 루프(big-roof)에 2만3천여개 LED 조명으로 태극기가 표현되었다. (자료사진)
광복 70주년을 맞아 부산 영화의 전당 빅 루프(big-roof)에 2만3천여개 LED 조명으로 태극기가 표현되었다. (자료사진)

한국의 이모저모를 알아보는 ‘서울통신’, 오늘도 VOA 도성민 기자 연결돼 있습니다.

진행자) 광복 70년을 기념하는 각종 통계가 연이어 발표되고 있는데, 70년간의 경제발전 규모를 비교한 자료도 오늘 발표됐군요?

기자) 한국의 경제발전을 왜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재확인할 수 있는 통계청의 자료입니다. 70년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은 어느덧 세계 13위의 경제 규모를 갖춘 나라로 성장했고, 인구는 70년 전에 비해 두 배로 늘었으며 도로 위의 자동차는 무려 1만5750배가 많아졌다는 내용이 다양한 항목별 수치 자료로 비교돼 있었습니다.

진행자)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많은 유엔군들이 한국이 이렇게 발전할지 상상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경제규모를 말하는 이런 통계 자료를 보면 그 변화의 정도를 한 눈에 확인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기자) 그렇습니다. 지난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는 1485조원이었습니다. 1953년 477억 원이었는데, 그 동안 3만 1000배가 증가한 것입니다. 명목 GDP는 1조 4104억달러로 세계 13위, 지난해 기준 GDP는 1조원을 넘긴 나라는 15개국에 불과했습니다.

진행자) 1인당 소득수준을 비교하면 조금 더 쉽게 와 닿을까요?

기자) 지난해 한국의 국민총소득(GDI)은 2만8180달러였습니다. 1953년에는 67달러였습니다. 세계 6위 수출국이 된 한국의 지난해 수출규모는 5727억 달러였고, 1956년 당시 수출규모는 2500만 달러에 불과했는데요. 북한에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었던 1997년 한국은 외환이 바닥나는 IMF구제금융을 겪었는데요. 1997년 당시 204억 달러에 불과했던 외환보유액은 지난해 3636억 달러로 18배 증가했는데요. 한국의 국가기록원은 한국의 경제발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료를 오늘(10일)부터 국가기록원 인터넷홈페이지에 공개했습니다.

진행자) 경제규모도 커졌지만 그만큼 물가도 비교할 수 없이 달라졌겠지요?

기자) 그렇습니다.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만합니다. 1945년 광복 때부터 1952년 한국 전쟁 때까지 물가가 약 330배 급등했고, 이후 1981년까지 해마다 두자릿수 이상의 높은 물가 상승률을 보이다가 이후 지금까지는 한자리수의 상승률인데요. 2010년 물가를 기준으로 보면, 1965년 소비자 물가지수는 3.02, 3014년에는 109.04로 36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965년 아이들 군것질 거리의 대명사 눈깔 사탕이 1원 이었다면 지금은 36원을 줘야 살 수 있다는 뜻이구요. 지금 3600원짜리 커피 한잔을 1965년이면 100원에 사 마실 수 있는 정도로 물가도 많이 올랐습니다.

진행자) 서울통신 함께 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우승한 한국대표팀이 귀국을 했군요?

기자) 목에 빛나는 금메달을 건 금의환향이었습니다. 어제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는 중국에서 귀국하는 슈틸리케 감독이 이끈 축구대표팀을 환영하는 인파가 몰렸는데요. 동아시안컵 우승! 이라고 쓴 현수막을 든 한국 축구대표팀은 주먹을 불끈 쥐고 우승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한국이 동아시아축구연맹(EAFF)축구 선수권대회에서 최고 자리에 오른 것은 2008년 이후 7년 만이구요. 2003년과 2008년에 이어 세 번째 우승입니다.

진행자) 이번 대회는 끝까지 경기 결과를 지켜봐야 했던 아슬아슬한 경기가 펼쳐지지 않았습니까?

기자) 한국과 북한, 중국, 일본의 경기가 모두 경합이었습니다. 중국에 2-0으로 이겼지만 일본과 1-1 무승부, 북한과 0-0 무승부로 경기를 마친 한국은 남의 나라 경기를 지켜보면서 우승을 기대해야 했던 아슬아슬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북한과의 경기에서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골이 모두 비켜나갔고, 북한의 골키퍼 리명국의 선방에 막혀 득점에 실패해 버린 한국은 대회 마지막 경기인 중국과 일본의 경기를 지켜보면서 우승을 기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1승2무로 승점이 5점이었고, 중국과 북한이 승점 4점, 일본은 2점이어서 일본에 잘해줬으면 하는 기대로 경기를 지켜봤을 겁니다.

진행자) 중국과 일본의 경기 결과에 따라 순위가 바뀔 수 있었는데, 1-1 무승부가 된 것이 한국으로서는 참으로 다행이었군요.

기자) 일본과 중국의 경기가 무승부가 됐기 때문에 한국이 우승컵을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인데요. 자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동아시아 최고의 자리에 오른 한국의 축구대표팀, 7년만의 금의환향은 분명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한국에 이어 중국 2위, 북한이 3위, 일본이 2무 1패에 그쳐 꼴찌로 대회를 마감했습니다.

진행자) 서울통신 오늘의 마지막 소식입니다. 팔만대장경의 경판 숫자가 8만1300판이라는 새로운 집계가 나왔군요?

기자)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팔만대장경의 경판 수는 일제강점기 때의 조사기록인 8만 1258장 이었는데, 한국 문화재청이 지난 10여 년간, 팔만대장경의 디지털화 사업을 해오면서 살펴보니, 이보다 94판이 많은 8만1352장인 것으로 확인된 겁니다. 그 동안 대장경판의 수에 대해서는 계속 논쟁이 있어왔는데, 그 동안 정밀 연구가 이뤄지지 않아 일제강점기 때 조사 결과가 그대로 인정돼 왔었던 겁니다.

기자) 팔만대장경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지요. 불교의 경전을 목판에 새겨 인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팔만대장경이지요?

기자) 그렇습니다. 고려시대에 불교 경전을 찍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경판 수가 8만여 개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팔만대장경’이라고 불리구요. 몽고의 침입으로 불탄 초조대장경으로 대신해 만들어졌다고 해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불리는데,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어서 해인사 팔만대장경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고, 한국의 국보 32호인 팔만대장경은 지난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됐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이번 조사결과를 아직 공식적으로 확정 지을 수 없는 사연이 있다고 하던데, 무슨 이야기인가요?

기자) 이번 조사 과정에서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경판이 있다는 것이 확인됐기 때문입니다. 36장에 달하는데요. 문화재를 관리하는 문화재청에서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경판은 국보가 아닌 등록문화재로 따로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불교계에서는 전체를 국보로 지정해야 한다는 입장인데요. 이런 부분이 문제가 된 이유는 한국의 유물이기도 하지만 세계기록유산의 가치와도 연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역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된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일제의 영향을 받은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국보와 세계기록유산에서 제외한 채 태조부터 철종실록까지만 포함시켰었습니다. 오는 10월, 관련 공청회와 학술대회가 열어 학계 사회적 합의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 결과에 따라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8만 1258판으로 기록돼 있는 팔만대장경의 경판 숫자도 바뀌게 됩니다.

지금까지 서울통신, 도성민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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