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 씨 암살 사건을 계기로 북한 정권의 `인질 외교’가 새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인질극은 주로 테러집단이나 범죄조직의 전유물이어서, 북한 정부의 행태는 불량국가 이미지만 더 악화시킨다는 지적입니다. 매주 깊이 있는 보도로 한반도 관련 현안들을 살펴 보는 `심층취재,’ 김영권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지난달 31일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김정남 씨가 화학무기로 암살됐던 이 곳에 평양에 억류됐던 말레이시아인 9명이 도착해 가족의 품에 안깁니다.
[녹취: 말레이 외교관] “Very glad! I’m very happy to be with our family member….”
외교관 아즈린 자인 씨는 북한에서 풀려나 가족들을 만나게 돼 매우 기쁘고 행복하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렇게 북한에 억류됐다 풀려나 가족들과 눈물의 상봉을 하는 장면은 국제사회에서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녹취: 공항 방송] “Ladies and gentlemen, please help me welcoming home Laura Ling and Euna Lee!”
지난 2009년. 북한에 142일 간 억류됐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으로 풀려난 미국인 여기자들도 공항에서 가족들을 만나 눈물을 쏟았습니다.
[녹취: 로라 링] (흐느끼며)“When we walked in through the door, we saw standing before us…”
로라 링 씨는 언제 노동교화소로 끌려갈지 몰라 공포에 시달리다 클린턴 전 대통령을 봤을 때 정말 기뻤다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북한 정권은 걸핏하면 미국인 등 외국인들을 억류해 인질로 삼았습니다.
사실상 인질로 북한에 억류됐다 풀려난 미국인들만 적어도 12명, 지금도 대학생 오토 웜비어 씨 등 미국인 2명과 한국계 캐나다인 임현수 목사, 한국인 여러 명이 1년 넘게 북한에 억류돼 있습니다.
미국의 민간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의 그레그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VOA’에, 북한 정권이 테러와 범죄집단의 전유물인 인질 전략을 수 십 년째 반복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녹취: 스칼라튜 총장] “다른 나라에서는 테러집단이나 범죄조직들이 하는 일인데 북한의 김 씨 일가 정권은 완전 테러 집단이나 조직처럼 행동하지 않습니까? 이게 어제 엊그제 일도 아니고 몇 십 년 전부터 그랬기 때문에 태도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억류 이유를 보면 정상적인 나라들에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란 지적입니다.
성경책을 호텔에 두고 나온 혐의, 비자 훼손, 서방세계가 제작한 북한 기록영화 동영상 소지 혐의 등 국제사회에서 별 문제가 없거나 국내법 위반으로 벌금형 정도에 처해질 사안들이란 겁니다.
또 국가 간에 문제가 생기면 외교관계에 관한 빈협약에 근거해 외교관을 추방하거나 기피인물로 지정하는 게 일반이지만, 북한처럼 외교관 등 민간인을 인질로 억류하는 비인도적 사례는 찾아 보기 힘들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정치협상 목적으로 이런 인질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미첼 리스 전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입니다.
[녹취: 리스 전 실장] “they haven’t achieved ransom that they want….”
북한의 김 씨 정권은 미국으로부터 인질의 몸값에 해당하는 정책 변화나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민간인을 억류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시간끌기를 한다는 겁니다.
실제로 북한에 억류됐던 미국인들은 과거 ‘VOA’와의 인터뷰에서 북한 관리들이 사전에 각본을 짜서 미 정부가 협상에 응하도록 압박했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에 억류됐던 케네스 배 씨입니다.
[녹취: 케네스 배] “사전에 짜인 것은 결국은 가족들로 하여금 미국 정부에 요청을 하고 압력을 가할 수 있도록, 그래서 외교적 노력을 다해줄 것을 요청하도록 했습니다.”
지난 2014년 북한에 억류됐던 제프리 파울 씨도 과거 ‘VOA’에, 북한 당국자들이 외신 인터뷰에서 해야 할 말을 사전에 지시하고 협상에 나와야 할 전직 미 대통령의 이름까지 제시하며 협박했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인권위원회의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북한이 국제사회의 강력한 비난과 국익 손해를 감수하면서 이런 인질 전략을 계속 구사하는 이유는 “정권 유지”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스칼라튜 총장]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북한의 정권이 비합리적 행동을 많이 한다고 볼 수 있지만 정권 유지를 위해 국제법을 위반할 수도 있고 다른 나라 사람들을 납북하고 인질로 잡을 수도 있고 북한 주민들도 희생시킬 수 있고. 바깥세계 입장에서 보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정치적으로 합법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북한의 현실입니다.”
전문가들은 외국인뿐 아니라 사실상 북한 주민들이 모두 김 씨 정권의 인질이라고 지적합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조제 하무스-오르타 전 동티모르 대통령은 과거 서울에서의 연설에서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결국 기본인권을 박탈당한 채 공산주의 왕정의 인질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오르타 전 대통령] “Where millions of human beings are deprived of basic human rights, hostages of..”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도 한국 망명 후 가진 첫 공개 기자회견에서 김 씨 정권의 인질 전략은 외국인뿐 아니라 북한 외교관과 주민들 모두에 해당되는 노예제도라고 비판했습니다.
[녹취: 태영호 전 공사] “부모와 자식 사이의 숭고한 사랑마저 악용하며 자식들을 북한에 인질로 잡아놓고 있는 김정은을 순한 양처럼 따르지만 말고 다같이 들고 일어납시다. 그 길만이 훗날 자식들에게 내가 부모로서 너희들의 노예의 사슬을 끊어줬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길입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인질극으로 김정남 씨의 시신과 용의자들까지 돌려받아 사실상 증거 인멸에 성공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정권에 부메랑이 될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당장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기자연맹 대표 등 회원국들의 일부 매체들이 “북한 정권이 동남아시아와의 친선을 모욕하고 있다”며 관계를 재고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의 문화부 장관 등 고위 관리들은 억류 사태 후 북한을 “깡패국가”라며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스칼라튜 총장은 이 때문에 인질 전략은 가뜩이나 좋지 않은 북한 정권의 이미지만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스칼라튜 총장] “북한 정권의 신뢰성이 완전히 떨어진 거죠. 북한의 이미지가 더 나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