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이 최전방 부대에서 하는 대북 확성기 방송이 매우 다양한 음악을 북한에 보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올해 가장 많이 송출된 음악은 1980년대 인기 가요였지만, `걸그룹' 등 신세대 음악도 많았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들 음악이 북한 병사들의 대남 인식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밝혔습니다. 서울에서 김영권 특파원이 보도합니다.
한국 국군심리전단이 최근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김학용 자유한국당 의원에게 ‘대북 확성기를 통한 한국 가요 현황’을 제출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한국이 북한에 가장 많이 송출한 가요는 가수 방미 씨의 ‘날 보러와요’ 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녹취: 날 보러와요 음악] “외로울 땐 나를 보러 오세요 울적할 땐 나를 보러 오세요 /깊은 밤 잠 못들 땐 전화를 해요 괴로움은 멀리 던져버려요. 서러움은 잊고…”
국군심리전단은 올해 1월부터 10월 말까지 100여 곡을 북한 지역에 송출했다며 이 가운데 ‘날 보러와요’가 14회로 가장 많았다고 밝혔습니다.
‘날 보러와요’는 1980년대에 나온 곡으로 외로움과 괴로움을 던져 버리고 날 보러오면 아낌없이 드리겠다는 내용의 가요입니다.
가수 인순이 씨의 대표곡인 ‘거위의 꿈’과 나훈아 씨의 ‘부모’는 8번이 송출돼 공동 2위에 올랐습니다.
[녹취: 거위의 꿈]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10년 전인 2007년에 출시된 ‘거위의 꿈’은 어려운 현실에 좌절하거나 묶이지 말고 당당하게 벽을 넘어 꿈을 펼치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또 나훈아 씨의 ‘부모’는 1979년에 출시된 가요로 부모님에 관한 정과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라는 가사를 담고 있습니다.
[녹취: 부모]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에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북한에 4번째로 많이 송출된 음악은 드라마 ‘응답하라 1988’로 큰 인기를 끌었던 이적 씨의 ‘걱정 말아요 그대’였습니다.
[녹취: 걱정 말아요 그대]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 깊이 뭍어 버리고….”
이밖에 태진아 씨의 ‘잘 살 거야’, 조용필 씨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녹취: 돌아와요 부산항에]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우네…”
10위 안에는 오래된 노래뿐만 아니라 최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총상을 입고 망명한 북한 군인이 병원에서 즐겨 듣는다는 소녀시대의 노래 ‘소원을 말해봐’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녹취: 소원을 말해봐] “소원을 말해봐 니 마음 속에 있는 작은 꿈을 말해봐….”
올해 많이 송출된 노래들은 최전방의 북한 군인들을 의식한 듯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꿈과 희망을 펼치라는 내용의 가사가 많았습니다.
지난해 가장 많이 송출됐던 거북이의 ‘비행기’와 양희은 씨의 ‘네 꿈을 펼쳐라’ 등도 꿈과 희망을 담은 가사들이 많았습니다.
국군심리전단은 프로그램 성격과 종류, 청취 대상 선호도 등을 고려해 다양한 장르의 곡을 북한에 보내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대북 확성기 방송은 지난 휴전 후 수 십 년 동안 방송과 중단을 거듭하다가 지난해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 뒤 방송을 재개해 지금까지 계속 송출하고 있습니다.
한국 군 당국은 하루 2~6시간에 걸쳐 500W급 대형 스피커 48개로 구성된 확성기 40여 대를 통해 방송을 송출하고 있다고 밝혔었습니다.
특히 고정식 확성기는 10km 이상의 거리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성능이 우수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몇 년 전 휴전선을 통해 한국에 망명한 북한 군인 정대한 씨는 ‘VOA’에 북한 군인들이 방송을 듣거나 전단을 보며 한국사회를 동경하거나 세상을 달리 보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정대한 씨] “저는 대북방송이 굉장히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처음 나온 군인들에게는 공포스럽기도 하겠죠. 좀 무서울 거에요. 하지만 그런 부분은 상당히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장마당 세대’로 불리는 북한의 신세대 병사들은 한국 드라마와 영화 등을 통해 한국 문화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음악을 들으며 한국사회를 더 동경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정 씨는 그러나 북한 군인들끼리 자기 생각을 주고받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 대부분 그런 정서를 느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석향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반복적인 음악을 통해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은 적지 않은 효과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녹취: 김석향 교수] “1~2년을 들으면 거부감을 가질 수 있지만 3년~5년을 들으면 밤마다 들리잖아요. 그것도 비슷한 음악이 밤마다 들리면 처음에는 가락을 듣고 흥얼흥얼하다가 깜짝 놀라서 조심하는데, 계속 들으면 가사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죠. 꿈이 뭐야. 왜 저런 노래를 하지? 왜 날아가고 싶다고 해? 날아간다는 게 무슨 뜻이야? 하는 것을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사람의 원초적 감성을 건드리기 때문에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름을 밝히기 거부한 한 북한 군인 출신 탈북민은 확성기 방송을 들으면 “제대 뒤에도 여운이 길게 남을 정도로 감성과 이성에 모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습니다.
정대한 씨는 자신의 주위에는 방송의 영향으로 탈북한 사람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정대한 씨] “통신병을 하다 보니까 통신선에 수화기를 연결하면 가끔 한국에서 하는 대북방송이 들린데요. 그것을 듣고 군대 전역하자마자 국경 쪽으로 해서 (한국에) 오신 분도 있어요”
한국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박주화 부연구위원은 과거 ‘대북 확성기 방송이 북한에 미치는 심리적 효과’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방송이 남한사회에 대한 긍정적 반응으로 일반화될 것으로 분석했었습니다.
박 위원은 음악이 인간의 생리적,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게 한다며 즐거움과 쾌락 등과 관련이 있는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를 촉진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유, 빅뱅, 소녀시대의 음악을 듣는 북한 병사들의 뇌에 도파민의 분비가 늘어나 북한 군인들이 즐거움을 느낄 것으로 예측해 볼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음악과 정확한 정보, 비정치적인 일기예보 등을 통해 남한사회에 대한 신뢰 형성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겁니다.
김석향 교수는 다양한 음악을 통해 북한 군인들이 세상에 관심을 두고 꿈을 꾸게 하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석향 교수] “남한사회나 외부사회의 실체를 보기 보다는 저런 음악을 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해 꿈을 꾸는 거죠. 그런 음악을 해도 되는 사회. 나도 저기 가면, 저긴 어떤 사회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한국군의 대북 확성기 방송 가요 송출 실태를 공개한 김학용 의원은 지난해 중부전선을 넘어온 북한군 병사도 대북 확성기 방송을 듣고 망명했다며, 대북 확성기 방송 등 관련 노력을 더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일각에서는 이런 대북 확성기 방송이 북한 수뇌부를 자극해 남북대화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며 이를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