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월요일 한반도 주요 뉴스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보는 ‘쉬운 뉴스 흥미로운 소식: 뉴스 동서남북’ 시간입니다. 오는 5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정상회담을 엽니다. 미국과 북한은 18년 전인 2000년에도 정상회담을 추진했지만, 당시 여러 정치적 요인으로 무산됐는데요, 닮은 듯 다른 과거 미-북 정상회담 추진 과정과 그 시사점을 최원기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미국과 북한이 비핵화와 국교 수립을 맞바꾸려 했던 것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북 핵 1차 위기가 불거지자 미국과 북한은 그 해 10월 제네바 기본합의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와 경수로, 그리고 미-북 국교 수립을 맞바꾸려 했습니다. 당시 북한의 핵 협상 대표였던 강석주 외무성 부상입니다.
[녹취: 강석주]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 합의문을 승인하도록 갈루치한테 지시를 하였고……."
제네바 기본합의는 북한의 비핵화와 함께 ‘양측은 정치적, 경제적 관계의 완전 정상화를 추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쌍방의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한다’는 내용과 함께 3개월 내 통신, 금융, 무역에 대한 제한을 완화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양국은 이 합의에 따라 평양과 워싱턴에 각각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기로 하고 부지와 건물 등을 물색했습니다.
그러나 외교관과 외교행랑의 판문점 통과 문제, 그리고 그 해 12월 발생한 미군 헬리콥터의 비무장지대 침범 등의 사건이 겹쳐 연락사무소는 개설되지 못했습니다.
1990년대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무부 북한담당관을 지낸 케네스 퀴노네스 박사는 당시 판문점을 관할하던 북한군이 미국 외교관이 판문점을 통해 평양을 드나드는 것에 반대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퀴노네스] "North Korean Army not want US diplomat travelling back and forth Panamunjum…"
그로부터 6년 뒤인 2000년 한반도 정세에 또 다른 전환점이 마련됐습니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 해 6월 평양에서 만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이어 10월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정권의 2인자인 조명록 인민군 차수를 특사 자격으로 워싱턴에 보냈습니다. 조명록 차수는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을 1시간 가량 예방했습니다.
미-북 양국은 이 면담을 통해 ‘조-미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했습니다. 이 코뮤니케는 한반도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서 공식적으로 6.25 전쟁을 종식시킨다는 내용과 함께 미-북 정상회담을 갖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당시 북한 관영 `조선중앙방송' 보도입니다.
[녹취:중방 ] ”앞으로 과거의 적대감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는 공약을 확언하였다.”
조명록 특사의 워싱턴 방문에 이어 10월23일 미국의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백화원초대소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두 차례 만나 미-북 정상회담 문제와 함께 핵과 미사일 문제 등을 논의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올브라이트 장관을 만나 나눈 대화의 한 장면입니다.
[녹취: 유투브] ”(올브라이트)Went to kindergarden, (김정일)기쁜 시간 보내셨는가, 만족하셨는가”
김정일 위원장은 만나고 워싱턴으로 돌아온 올브라이트 장관은 “김정일 위원장이 남의 말을 경청하는 훌륭한 대화 상대이며, 실용주의적이고 상당한 유머 감각이 있는 지도자”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러나 일련의 국내외 정치 상황이 미-북 정상회담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당시는 클린턴 대통령의 임기가 6개월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야당인 공화당이 미-북 정상회담에 부정적이었고, 그 해 11월 7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는 플로리다에서 개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결국 이 문제가 법정으로 가는 등 정치적 파문으로 이어지면서 미국 내 상황이 상당히 복잡해졌습니다. 또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충돌이 발생해 큰 유혈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결국 클린턴 대통령은 12월21일 “평양에 가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미국과 북한 간 역사적인 정상회담이 성사 일보 직전에 무산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2018년 3월, 미국과 북한 수뇌부는 다시 미-북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2000년과 지금 모두 북 핵 문제 해결이라는 목적은 같지만 상황은 크게 다르다고 지적합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북 핵 문제가 상당히 고도화됐다는 겁니다. 클린턴-김정일 정상회담이 추진되던 2000년만 해도 북 핵 문제는 미-북 제네바 합의로 동결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그 동안 6번이나 핵실험을 했으며, 미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도 확보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과거 오바마 행정부에서 북한을 담당했던 데니스 와일더 전 백악관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은 정상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김정은 위원장이 어느 정도 비핵화 의지를 갖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와일더] ”We don’t know until negotiate..”
미국이 강력한 대북 제재를 가하고 있는 점도 과거와는 다른 점입니다. 북한이 핵, 미사일 도발을 계속하자 미국은 유엔 안보리를 통해 10여개의 대북 제재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또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을 압박해 대북 원유 공급을 제한하고 휘발유 등 정제품 공급을 75% 줄였습니다. 북한의 최대 돈줄인 광물과 섬유 수출도 차단됐습니다.
그 결과 북한은 심각한 에너지난과 외화난, 물가난을 겪고 있습니다. 북한이 현재 경제난을 겪고 있다는 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녹취: 김정은 국무위원장] ”지난해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의 반공화국 고립압살 책동은 극도에 달했으며 우리 혁명은 유례없는 엄혹한 도전에 부닥치게 됐습니다.”
미-북 정상회담에서 얼굴을 맞댈 미국과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바뀐 것도 주목할만한 대목입니다. 18년 전에 정상회담이 이뤄졌다면 빌 클린턴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만났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반도 핵 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상황에서 올해 72살인 트럼프 대통령과 34살인 김정은 위원장이 담판을 벌이는 겁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모두 승부욕과 자존심이 남달리 강한 성격입니다.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한반도 정세를 주도하는 것도 눈에 띄는 대목입니다. 2000년에도 한국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한 뒤 미-북 관계 개선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문재인 대통령이 대북 특사 파견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은 물론 미-북 정상회담까지 만들어 정세를 주도하고 있는 것도 큰 차이점입니다.
전문가들은 미-북 정상회담이 기회인 동시에 위험 부담도 크다고 말합니다. 정상회담이 성공하면 핵 위기가 해소될 수 있지만, 실패할 경우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VOA뉴스 최원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