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결핵 문제가 심각한 위험으로 치달을 수 있는 갈림길에 서 있다고 대북 의료지원 단체인 유진벨 재단이 밝혔습니다. 국제사회의 지원 중단과 대북 제재로 다제내성결핵이 제2의 메르스 같은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서울에서 김영권 특파원이 보도합니다.
[녹취: 린튼 회장] “이건 응급 상황입니다. 집에 불이 났어요. 그리고 그 집 바로 붙어있는 집은 방심하고 있습니다. 자기 집까지는 불길이 안 올 줄 알고.”
지난 1995년부터 대북 의료 지원 사업을 펼쳐온 유진벨 재단의 스티븐 린튼 회장의 목소리가 커집니다.
북한의 다제내성결핵 문제가 제2의 메르스 같은 위기 상황에 놓일 수 있는데 지척에 있는 한국 정부와 사회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한 겁니다.
[녹취: 린튼 회장] “결핵이 사람을 몇 개월 안에 죽인다면 벌써 (한국에) 비상이 걸렸을 겁니다. 에볼라같이. 에볼라보다 무섭습니다. 사람을 훨씬 더 많이 죽여요. 그런데 결핵은 사람을 천천히 죽여요. 3~5년 사이에 죽이니까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겨요. 응급 상황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이죠. 만약 결핵 환자들이 몇 개월에 팍 쓰러졌으면 벌써 뭐 제재가 뭐 문제 되겠습니까? 그냥 바로바로 한국에서 필요한 지원이 무조건 갔을 겁니다.”
북한의 다제내성결핵(중증 결핵) 환자 치료에 집중하고 있는 유진벨 재단이 17일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에 대한 한국 정부와 사회의 관심을 촉구했습니다.
다제내성결핵은 기존 치료제에 내성이 생겨 치료약이 효과를 내지 못하는 만성적인 중증 결핵으로, 치료에 적어도 3~5년 이상이 필요합니다.
지난달 16일부터 이달 6일까지 방북해 다제내성결핵 환자를 치료하고 돌아온 이 단체 대표단은 북한의 결핵 문제가 기로에 서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국제보건학 박사인 이 단체 최세문 이사입니다.
[녹취: 최세문 이사] “북한의 결핵 문제는 지금 기로에 섰습니다. 지금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될 것인가, 개선될 것인가는 국제사회와 남북한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세계기금(The Global Fund)이 지난 2월 대북 지원을 중단하면서 약품 조달에 비상이 걸렸고, 유엔의 대북 제재로 검사기 등 제품 반입에도 여러 달이 걸리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겁니다.
세계기금은 지난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북한 내 결핵과 말라리아 퇴치 지원에 미화 1억 300만 달러를 지원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2월 북한 내 자원 배치와 지원금의 효율성에 대한 보장, 위험 관리 수준이 이사회 요구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며 지원을 전격 중단했습니다.
최 이사는 이로 인해 환자 치료에 빨간불이 들어오고 있다며, 내년 상반기에 약을 주문하지 못하면 결핵 약품 부족 사태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최세문 이사] “1차 결핵약 재고는 2010년 1분기까지, 다제내성결핵 약제는 2018년 가을에 등록한 환자분까지 남아 있습니다. 북한에 약을 보내기 위해서는 강화된 제재에 따른 해상운송과 통관 검역 절차로 인해 약 9개월이 걸립니다. 내년 상반기에는 약을 주문해야만 결핵 약품 부족 사태를 막을 수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북한 내 결핵 환자는 2017년 말 현재 13만 1천 명. 이 가운데 다제내성결핵 환자는 8천 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제내성결핵은 모니터링이 어렵고 약품도 워낙 비싸 올해는 28%의 환자만 치료를 받았다는 게 재단 측 설명입니다.
최 이사는 세계기금의 지원이 끊기고 유엔의 긴급기금 지원 여부도 확약할 수 없는 내년이 되면 자칫 치료에 공백이 생겨 더 큰 대가를 치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최세문 이사] “결핵의 특성상 치료 공백이 발생하면 다제내성결핵 환자가 계속 늘어나게 됩니다. 일반 결핵보다 약값만 백 배가 넘고 치료 기간이 긴 다제내성결핵 환자 수가 증가하는 겁니다. 북한 다제내성결핵 환자 1명당 약값은 200만 원이 들어가지만, 남한에서는 같은 환자의 치료비로 1천 300~3천만원 가량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결핵 상황을 제대로 대비하지 않으면, 훗날 더 큰 비용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 단체는 세계기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2~3백만 달러의 추가 지원, 결핵 퇴치 사업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제재 면제 승인, 개성공단 내 국가결핵표준실험실 설립을 제안하며 모두 한국 정부와 사회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호소했습니다.
린튼 회장은 이를 위해 국제사회를 적극 설득하는 한국 정부의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녹취: 린튼 회장] “결핵의 응급 상황 앞에서는 남북 교류로도 풀려고 해야 하지만, 이제는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한국이) 직접 하기 어려운 일들을 국제기구들을 동원시키고 격려하고 예산을 공급하면서 국제기구들이 그 공백을 메우도록 하는 적극적인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그냥 앞으로 남북관계에서 다 해결하겠다고 하는 것은 어떤 분야에서는 해결할 수 있지만, 공기로 전염되는 병을 억제하는 것에서는 잘못하면 큰 공간이 생겨 문제가 더 커질 수 있죠.”
프랑스와 캐나다가 유엔 안보리 제재위원회를 설득해 자국 민간단체가 대북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처럼 한국도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아울러 개성시에도 다제내성 환자들이 있다며, 남북연락사무소까지 건설할 만큼 제재 면제가 가능하다면 왜 환자들 병동, 나아가 한국의 우수한 인력과 장비로 결핵 진단 검사를 할 수 있는 국가결핵표준실험실을 설립할 수 없겠냐고 반문했습니다.
[녹취: 린튼 회장] “연락사무소까지 건설할 만큼 제재 면제가 가능하다면 왜 환자들 병동은 못 합니까? 쉽게 할 수 있죠. (중략) 국제사회의 제재가 강한 분위기에서 면제를 받으려면 응급 지원에 국한에서 하는 게 낫습니다. 왜냐하면 나무 심기와 죽어가는 사람에게 약을 주는 것은 다르거든요. 그래서 한국 정부가 응급 지원만을 위한 통로로 개성공단의 일부를 그렇게 키워나가면 일단 전염병 관리 통로. 그렇게 이름을 붙여도 되는 게 그러면 크게 반대할 데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한국 정부가)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습니다.”
린튼 회장은 미국의 대북 제재는 인도적 지원을 예외로 허용하면서도 전용될 우려가 있는 개발 지원은 사실상 막는 추세라며, 이런 흐름이 진단소와 진료소, 요양소 건축을 위한 자재 반입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공기로 전염되는 결핵은 먼 거리의 미국보다 한국이 더 예민해야 하지만, 미국은 주춤, 한국은 소심해 보건 위기만 커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통일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17일 `VOA'에 “한국 정부는 북한 주민의 인도적 상황 개선과 삶의 질 증진 차원에서 인도적 지원을 정치적 상황과 분리해 지속적으로 추진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영유아와 임산부 등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과 감염병 예방 등 보건의료 분야 지원을 우선 추진할 것”이라면서도, 결핵에 관해서는 담당 부처와 검토해서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했습니다.
서울에서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