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농업경제학자 조지 워싱턴 카버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조지 워싱턴 카버는 노예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수많은 농산품을 개발해 미국 농업경제의 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은 농화학자이자, 식물학자, 농업경제학자입니다.
그는 미주리주 다이아몬드에서 아버지 길스와 어머니 매리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860년에서 1864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들 노예 가정의 주인은 광대한 농장을 갖고 있는 독일계 이민자인 모지스 카버였습니다. 조지는 태어난 지 일주일쯤 됐을 무렵, 노예 매매단에 납치되는 끔찍한 사건을 겪게 됩니다. 그는 어머니, 누나와 함께 켄터키주로 끌려갔습니다. 주인 카버는 사람을 사서 이들을 찾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조지만 찾았을 뿐 불행히도 다른 가족은 찾지 못했습니다.
모지스 카버는 조지를 찾아온 다음 그를 친 자식처럼 키웠고 공부도 시켰습니다. 성도 자기 성을 주어 조지 카버로 불렀습니다. 조지는 몸이 허약한 편이어서 농장 일은 잘 못했지만 탐구정신은 강했습니다. 당시 흑인들에게는 고등학교 진학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캔자스주에 있는 미니애폴리스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카버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대학 공부까지 계속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오와주 인디아놀라에 있는 심슨칼리지에서 미술과 피아노를 공부했습니다. 이어서 아이오와 주립 농업대학의 식물학과에 들어갔습니다. 조지는 이 학교 최초의 흑인 학생이자 최초의 과학 학사가 됐습니다.
조지는 대학 졸업 후 아이오와 실험 농장에서 연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조지는 특히 콩의 곰팡이병에 대한 연구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조지는 식물 병리학과 식물 구균학에서 뛰어난 연구 실적을 내놓아 농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담당 교수는 대학원 진학을 적극 권장했습니다. 드디어 1896년 카버는 농학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여러 군데서 일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 중 가장 매력적인 것은 흑인 대학인 터스키기 대학의 요청이었습니다. 당시 터스키기 대학의 부커 워싱턴 학장은 이 학교에 농대를 설립하려는 계획을 갖고 카버를 초빙했습니다. 조지 카버는 사망할 때까지 47년 동안을 이 대학에서 교육과 연구에 전념했습니다. 조지 카버는 부커 워싱턴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고 후에 자신의 이름에 워싱턴을 넣어 조지 워싱턴 카버가 됐습니다.
카버는 연구실에만 앉아있지 않고 말이 끄는 이동식 연구실을 만들어 각지를 돌아다니며 농민들을 도왔습니다. 실제로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준 것 중의 하나는 농작물 순환제 재배 방법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남부 여러 주에서는 목화가 가장 널리 재배되는 작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땅에 목화를 거듭 재배하다 보니 땅의 양분이 고갈돼 수확이 심각하게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카버는 다른 작물을 돌아가며 재배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우선 질소를 만들어 주는 땅콩을 재배하고, 그 다음에 고구마, 그 다음에 다시 목화를 재배하는 식입니다. 그 결과 목화 수확이 엄청나게 늘어나 농민들에게 막대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카버는 ‘피넛맨(Peanut Man)’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땅콩에서 식용은 물론이고 공업용, 산업용 제품까지 무려 300가지가 넘는 제품을 개발했습니다. 여기에는 밀크, 우스터 소스, 펀치, 요리 기름, 야채 기름(salad oil), 종이, 화장품, 비누, 나무에 들이는 물감 등이 포함됩니다. 뿐만 아니라 땅콩을 원료로 한 의약품, 즉 방부제, 변을 무르게 하는 제품, 갑상샘 치료제 등을 개발했습니다.
1921년 카버는 땅콩 재배 농가의 면세법안 통과를 위해 연방 하원 청문회에 출두했습니다. 그가 등장하자 의원들은 처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카버가 자신이 개발한 많은 제품을 설명하자 의원들은 너무나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고,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보냈습니다.
노예 출신 흑인 학자에게 기립 박수를 보낸 의원들은 땅콩을 일반 식품으로 인정해 면세 조치를 내렸음은 물론입니다. 카버는 고구마에서도 분말제품, 식초, 염료, 잉크 등을 발명했습니다.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비싼 사료를 사다 쓰는 대신 도토리류를 먹이는 아이디어도 가르쳤습니다. 옥수수 대를 건축 자재로 만드는 방법도 개발했습니다.
카버는 사회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노년의 20년 동안에는 그다지 활발한 연구 활동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돕는 일에는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남부를 여행하면서 인종 간 화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카버는 인도도 방문해 마하트마 간디를 만나 개발도상국의 영양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카버는 기독교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이 사회의 분열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일요일이면 터스키기 대학교에 마련된 주일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카버는 일생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카버는 자신의 전 재산과 소장품을 카버 박물관과 조지 워싱턴 카버 기금에 기증했습니다.
카버는 1943년 1월 5일, 터스키기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80세 전후. 그의 시신은 터스키기 대학 묘지에 안장됐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카버의 기념비 건립 법안에 서명했습니다. 기념비는 미주리 주 다이아몬드에 세워졌습니다.
생전에 그는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의 스핑간 메달을 받았습니다. 심슨 대학은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했고, 미국 남부 지방 농업에 기여한 공로로 루즈벨트 메달이 수여됐습니다. 조지 워싱턴 카버는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도 헌정됐습니다. 미국 해군은 탄도미사일 잠수함을 ‘조지워싱턴카버호’로 명명했고, 미국 우정국은 그를 기리는 기념우표를 발행했습니다.
“재산과 이름을 얻을 수 있었지만 어느 것에도 마음 쓰지 않았고, 오직 세상을 돕는 데서 행복과 영예를 발견한 사람이 여기 있다.” 그의 묘비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