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브로드웨이 극장가의 전설, 조지 애벗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뉴욕 시 중심가에 자리 잡은 브로드웨이 극장가. 40여 개의 극장에서 연중 펼쳐지는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미국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2017년 한해 브로드웨이 뮤지컬 관람 인원은 1천380여만 명. 문화 예술의 공간 브로드웨이는 미국 드라마의 중심이자 뉴욕시의 필수 관광지이기도 합니다.
문화계 전문가들은 오늘날의 브로드웨이가 되기까지 조지 애벗만큼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브로드웨이의 역사는 그대로 조지 애벗의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애벗은 극작가이면서 영화감독이기도 하고 연극과 뮤지컬의 감독 겸 프로듀서, 그리고 직접 출연도 하는 배우이기도 했습니다. 애벗이 관계한 작품은 120개가 넘습니다.
가장 인기 있었던 작품 중 하나는 1955년 공연된 뮤지컬로 ‘댐양키스(Damn Yankees)’입니다. 워싱턴 세내터스(Washington Senators)라는 프로 야구팀 선수에 관한 이야기로, 이 선수는 팀이 챔피언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넘기는 줄거리로 돼 있습니다.
애보트가 극본을 쓰고 감독한 이 뮤지컬은 모두 8개 분야에서 토니상을 휩쓸었습니다. 1994년에는 신판 ‘댐양키스’가 브로드웨이에 올려졌습니다. 이 뮤지컬도 조지 애벗이 제작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106세였습니다.
그 외에도 ‘점보(Jumbo)’, ‘팔 조이(Pal Joey)’, ‘나를 마담으로 불러줘요(Call Me Madam)’, ‘파자마게임(Pajama Game)’, ‘피오렐로!(Fiorello!)’ 등이 큰 성공을 거둔 작품들입니다. 어떤 때는 그가 참여한 인기 절정의 뮤지컬 3개가 동시에 공연된 적도 있었습니다.
조지 애벗은 1887년 뉴욕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정식 이름은 조지 프랜시스 애벗. 로체스터대학교 재학 중 희곡을 쓰고 연극반에 들어가 연기를 익혔습니다. 또 하버드대학교에서는 희곡을 공부했습니다.
1913년 연예계 진출의 꿈을 안고 뉴욕시로 갔으나 어떤 출연 요청도 없어 처음에는 좀처럼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작 보조 일을 시작으로 차츰 각색과 제작에 개입하게 됐습니다. 1926년 그는 드디어 최초의 히트작 ‘브로드웨이(Broadway)’를 제작했습니다.
애벗은 할리우드의 영화에도 진출했습니다. 1928년에서 1958년 사이 제작된 11편의 영화 가운데 가장 호평을 받은 작품은 그가 시나리오를 쓴 ‘서부전선 이상 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였습니다.
1920년대가 시작되면서 조지 애벗은 최소 1년에 한 작품씩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했습니다. 어떤 때는 무려 5개의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애벗은 젊은 무명의 연예인들을 많이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애벗에 발탁됐다 나중에 대형 스타로 떠오른 인물이 많습니다.
여배우 헬렌 헤이즈, 셜리 매클레인, 캐럴 버넷, 남자 배우 진 켈리, 에디 앨버트 등 쟁쟁한 멤버들이 있습니다. 애벗은 무명 작곡가, 무용수, 제작자도 유명인사가 되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중에는 해럴드 프린스, 레너드 번스타인, 밥 포시, 제롬 로빈스 등이 있습니다.
조지 애벗은 여러 면에서 미국 극장의 흐름을 변모시켰습니다. 그는 가벼운 사랑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심각한 내용도 뮤지컬로 만든 최초의 제작자였습니다. 발레 댄서들을 뮤지컬에 등장시킨 것도 애벗이 처음이었습니다. 1936년 발레 전문가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과 함께 ‘온유어토스(On Your Toes)’라는 뮤지컬을 만들었습니다.
조지 애벗은 공연 예술에서 받을 수 있는 상은 거의 모두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애벗은 평생공로 토니상을 받았습니다. 1982년에는 케네디 센터 평생 성취상도 받았습니다. ‘피오렐로!’를 포함해 4개의 뮤지컬은 토니상을 받았습니다.
‘피오렐로!’는 정치인들이 공금을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혐의를 받을 때 어떻게 둘러대는지를 풍자하고 있습니다. 1940년대 뉴욕 시의 시장을 지낸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Guardia)의 삶을 다룬 피오렐로는 1959년 무대에 올려진 후 드라마 부문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조지 애벗은 극장 공연으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돈을 함부로 쓰지 않고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썼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지원을 해주지 않는 작품에 자금을 대주기도 했습니다.
1987년 100세 생일을 맞았을 때 배우들은 그에게 큰 파티를 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애벗을 위한 공연도 펼쳤습니다. 그리고 애벗이 특별히 좋아하던 노래 ‘댐얭키스’에 나오는 ‘마음(Heart)’으로 파티의 마지막을 장식했습니다.
브로드웨이가 곧 그의 삶이었기에 ‘미스터브로드웨이(Mr. Boradway)’로 불렸던 조지 애벗은 남부의 휴양지 마이애미비치에서 1995년 1월 31일, 107세를 일기로 타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