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세계 최대의 유통기업 월마트 창업자, 샘 월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밤이든 휴일이든 항상 손님을 맞고 있는 월마트는 미국을 비롯해 세계 27개국에 1만1 천여 개가 넘는 매장을 갖고 있는 유통기업입니다. 경제지 포츈의 2018년 글로벌 500에 따르면, 월마트는 연 5천억 달러의 총수입으로 매출액 면에서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외국 매장까지 합친 종업원 수는 220만 명에 달합니다.
한때 미국 최고의 부자로 꼽히기도 한 창업자 샘 월튼은 1918년 3월 29일 오클라호마주 킹피셔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샘은 어렸을 때부터 매우 열심히 일하는 아이였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운동도 좋아해서, 고등학교 때는 학교 미식 축구 팀 선수로 활약해 인기가 높았습니다. 미주리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샘은 시간제로 일을 해 학비를 벌었습니다. 1940년 샘은 경제학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샘의 첫 번째 직장은 제이시페니(J.C. Penny)라는 백화점이었습니다. 약 1년 반 정도밖에 안 됐지만 샘은 소매점 경영에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을 때 이곳에서 느낀 점과 가치, 아이디어 등은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그는 육군에 들어갔습니다.
제대 후 아칸소주 뉴포트로 옮긴 샘은 조그마한 가게라도 열어보려 했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백방으로 돈을 구하던 차 친척과 군대의 융자 계획으로 2만여 달러를 대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샘은 동생 버드와 함께 값싼 물건을 파는 잡화상을 샀습니다. 처음으로 사업체를 갖게 된 샘 월튼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매상이 크게 늘어났고 불과 2년 만에 빌린 돈도 다 갚았습니다.
그러나 임대 계약이 끝나자 건물주가 계약 연장을 해주지 않아 더 이상 그 가게를 운영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업체를 잃었지만 월튼은 좌절하지 않고 벤튼빌이라는 곳에 다시 가게를 차렸습니다. 이번에는 가게가 있는 건물을 아예 매입하고 문을 열었습니다. 가게 이름을 월튼스(Walton's)라고 붙였습니다. 열심히 일한 덕에 이 가게도 손님이 많았고, 곧 이익을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이 가게는 아칸소주 내 최대이자 최고의 이윤을 내는 업소가 됐습니다. 샘 월튼은 다른 소도시에도 상점을 열었습니다. ‘싼 가게’, 그리고 물건을 손님이 직접 골라 들고 계산대로 오는 ‘셀프서비스’ 방식 등으로 매점은 모두 성공적이었습니다.
월튼은 유능한 직원을 상점 관리인으로 승진시켰습니다. 그리고 각 지점의 관리인들에게는 매상액에 따라 상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직원들은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매점 수는 점점 더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샘 월튼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대형 할인 매점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대형 매점을 여는 데는 큰 자본이 필요했습니다. 박리다매가 월튼의 사업 철학이었지만 투자가들에게 이런 점을 설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끈질긴 노력 끝에 투자를 유치한 샘 월튼은 1962년 아칸소주 로저스라는 곳에 첫 번째 월마트를 개업했습니다.
샘 월튼은 매일매일 최저가 “everyday low price”라는 표어를 내 걸고 낮은 가격과 친절한 서비스에 주력했습니다. 과감한 환불 제도도 실시했습니다. 불안한 도박이었지만 첫 번째 월마트는 대성공이었습니다. 2년 후에는 두 번째, 4년 후에는 세 번째 월마트가 문을 열었습니다. 1968년에는 24개, 1975년에는 125개, 1985년에는 882개로 계속 늘어났습니다.
연쇄망이 커가면서 샘 월튼은 경영 방식을 개선해 나갔습니다. 특히 주력하는 부분은 능률적 경영이었습니다. 그는 새로 문을 여는 영업장은 그 지역의 대형 물류창고들이 모여 있는 지역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상품은 여러 매장에 비치할 수 있도록 한꺼번에 대량으로 구입했습니다. 공급처에서는 대량 구입을 하는 월마트에 싼 가격에 넘길 수가 있었습니다.
샘 월튼의 경영에는 ‘종업원이 행복해야 고객도 행복하다’는 철학도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샘 월튼은 ‘종업원의 복지’에 중점을 두고 회사 지분과 주식을 할인된 가격으로 분배했습니다. 그는 종업원들을 ‘직원(employee)’라는 용어 대신 ‘동료(associate)’라고 불렀습니다. 월튼은 매점의 지배인이나 환경미화원이나 똑같이 거리감 없이 대했습니다. 그에게 ‘갑질’ 같은 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부자였지만 샘 월튼은 검소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운동 모자를 쓰고 허름한 옷차림에 빨간색 포드 픽업트럭을 타고 다니는 시골 아저씨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기자는 취재차 그를 찾아갔다가 재벌 총수의 사무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작은 규모에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주 직원들과 함께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습니다.
월마트는 종업원들의 임금이 낮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데 인색하며, 주주들에게는 높은 배당금을 지급한다는 등 논란도 없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마트는 2019년 4월 현재 11,368개나 되는 매장을 갖는 세계 최대의 체인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월마트는 백화점 중심의 소매유통산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또 유통이 제조보다 우위에 서게 함으로써 전 세계 소비자들이 최저가에 제품을 소비할 수 있는 소비자 중심 사회를 이끌어 냈습니다. 1992년 3월 조지 부시 대통령은 월튼에게 민간인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월튼의 이야기는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성공은 우리의 성공이고 아메리카의 성공이라고 말했습니다.
경제잡지 포브스는 1985년에 그를 미국 최고의 부자로 꼽았습니다. 시사 주간지 타임은 1998년 샘 월튼을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에 선정했습니다. 경제지 포춘은 2003·2004년 연속 월마트를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꼽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샘 월튼이라도 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부자 샘 월튼은 같은 해인 1992년 4월 5일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74세였습니다.
작은 상점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유통기업을 키워낸 샘 월튼. 그는 갔지만 그의 리더십과 경영철학은 ‘기업 경영의 바이블’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