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가정보원은 북한의 이번 수해가 김정은 집권 이후 가장 심각한 수준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대내외 악재로 집권 후 최악의 상황을 맞은 김정은 정권은 위기 극복을 위해 ‘민심 달래기’ 선전정치에 주력하고 있다는 관측입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한국 국가정보원은 20일 국회 정보위원회 비공개 업무보고에서 “북한이 집중호우로 강원과 황해남·북도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며 “특히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후 최대 피해를 기록한 2016년보다도 농경지 침수 피해가 크게 증가했다”고 밝혔습니다.
북한은 앞서 지난 13일 김정은 국무위원장 주재로 제7기 16차 노동당 정치국 회의를 열고 이번 홍수로 3만9천296정보, 약 390㎢의 농경지가 피해를 입고 살림집 1만6천680여 세대, 공공건물 630여 동이 파괴 또는 침수됐다고 피해 규모를 공개했습니다.
국정원은 또 북한의 경제 상황에 대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인한 “국경봉쇄 장기화로 외화 부족 현상이 심화하고 있고 주요 건설 대상을 대폭 축소하고 당 핵심 기관들이 긴축 운영하는 동향이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어 “국경통제로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다가 긴급 대응으로 진정 국면으로 가고 있다”며 하지만 이대로 가면 올해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김정은 정권 들어 2017년까지 장마당 경제 활성화 등을 통해 비교적 경제가 나아졌다가 대북 제재와 신종 코로나 사태, 홍수 피해 등 삼중고에 시달리며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북한은 19일 당 전원회의를 통해 혹독한 대내외정세와 예상치 못한 도전들을 이유로 사실상 경제 재건 전략이 실패했음을 인정했고 김 위원장은 내년 1월 당 대회를 열어 새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제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김 위원장이 사실상 실패를 자인한 이후 북한 매체들은 간부들의 자책과 자성의 목소리들을 대대적으로 전했습니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1일 1면에 경제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는 고위 간부들의 기고문들을 실었습니다.
기고문 행렬엔 장길룡 내각 화학공업상과 북한 3대 제철소로 꼽히는 김책제철연합기업소 김광남 지배인, 그리고 이번 집중호우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황해북도 박창호 도당위원장 등이 나섰고 이들은 경제 실패의 책임이 자신과 같은 간부들에게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와 함께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은 20일 폭우 피해가 극심한 황해북도 대청리 은파군 등지에서 간부들이 수재민들에게 군 당위원회 청사나 군 인민위원회 청사를 내주고 자신들은 천막에서 사무를 보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홍민 북한연구실장은 북한 간부들의 이런 행동은 정권의 위기관리 차원에서 민심을 달래기 위한 적극적 형태의 선전정치로 풀이했습니다.
홍 실장은 북한으로선 수해는 물론 대북 제재와 신종 코로나 사태까지 겹친 초유의 상황이라며 통신수단의 발달로 정보 통제도 여의치 않기 때문에 주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한 실질적인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홍민 실장] “실질적인 지원과 실질적인 것들을 많이 주지 못하더라도 그런 행동 자체의 표상을 만들어냄으로써 주민들에게 일종의 어떤 통치자의 권위와 민심에 대한 성의 이런 것들을 좀 표현하는 방법이 아닐까 라는 게 큰 차원의 얘기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한국 민간단체인 아산정책연구원 고명현 박사는 김정은 시대 들어서 북한은 정상국가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행동을 보여왔다며 수해 상황을 공개하고 정책 실패를 지도층이 자인하는 최근의 행보도 이런 이미지 정치의 연장선에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고 박사는 또 정상국가 이미지를 통해 최고지도자의 책임을 분산시키는 효과도 노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고명현 박사] “양면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론 책임 소재를 분산시키면서 지도자에게 집중될 수 있는 책임 추궁을 약화시키는 모습도 있지만 김정은 지도체제가 들어서면서부터 보여줬던 일관된 모습, 정치체제 정상화 그런 것을 이번에도 다시 보여주는 게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 위원장이 13일 정치국 회의에서 신종 코로나를 이유로 외부 지원을 허용하지 말라고 지시한 데 이어 북한은 이번 당 전원회의에서도 대외관계와 관련해 공개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홍민 북한연구실장은 정권이 버티기 힘들 정도의 위기 상황은 아닌 것 같다며 특히 중국으로부터의 지원이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홍 실장은 대미 협상력 차원에서 한국에 대한 지원 요청도 하지 않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녹취: 홍민 실장] “대미 협상력을 키우기 위한 태도가 있는데 거기에 남쪽과의 화해 모드라든가 지원을 받는 모드는 사실상 걸맞지 않죠. 그렇기 때문에 어떻든 자신의 일관되고 강한 입장을 보여주기 위해선 대남 관련해선 조금 더 냉대하는 태도 또는 경색된 태도가 오히려 대미 협상력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부분이 있는 거거든요.”
한국의 민간단체인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신범철 외교안보센터장은 북한이 뾰족한 해법이 없는 상황에서 일단 내부 결속에 주력하며 문제를 내년 1월 당 대회까지 미뤄놓은 형국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녹취: 신범철 센터장] “지금은 대외관계도 꽉 막혀있고 대내 경제도 어렵다, 이 대내 경제상황에서 아마 중국이 지원해서 굶어죽는 사람은 안 나올거다, 그러니까 일단 넘기고 올 한 해는 자기의 리더십이 자력갱생이었기 때문에 자력갱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미국 대선 이후에 새로운 전략 상황을 읽고 내년에 아젠다를 던지면서 거기에 맞춰서 나가겠다, 그 정도 상황인식을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수해로 인한 식량난이 본격화되면 외부 지원에 대한 태도를 바꿀 여지는 남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당국간 공식 교류보다는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제한하려고 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서울에서 VOA 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