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한 외교 당국이 한반도 종전선언 문제를 계속 논의하고 있지만 워싱턴에서는 양국 간 입장차가 좁혀지기 어렵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북한이 무리한 선결 조건을 요구한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미국의 호응을 얻기 더욱 어려워졌다는 회의론이 우세합니다. 백성원 기자가 보도합니다.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종전선언에 대한 미국과 한국의 관점이 완전히 다르며 절충점을 찾기도 어렵다고 진단했습니다.
종전선언이 북한 비핵화의 입구가 될 수 있다는 한국 정부의 주장은 바이든 행정부를 포함해 미 역대 정부가 제시해온 한국전 종전 조건과 간극이 너무 크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지난 26일 종전선언 관련 질문에 “우리는 각각의 조치를 위한 정확한 순서, 시기, 조건에 관해 다른 관점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답변한 것은 이런 분석에 더욱 힘을 실었습니다.
종전선언에 대한 미-한 간 협의는 공개적으로 다룰 주제가 아니라는 점을 두 번이나 언급한 설리번 보좌관의 신중한 태도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패트릭 크로닌 허드슨연구소 아시아태평양 안보석좌는 ‘순서, 시기, 조건’ 문제를 제기한 설리번 보좌관의 발언을 “바이든 행정부는 북한이 핵무기를 점진적으로 철폐할 용의가 있다는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이런 선언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했습니다.
[패트릭 크로닌 허드슨연구소 아시아태평양 안보석좌] “The Biden administration will not back such a declaration in the absence of evidence that Pyongyang would be willing to begin rolling back its nuclear weapons.”
그러면서 “북한 쪽에서 비핵화에 대한 진지한 의지가 없다면 종전선언은 무의미하다”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패트릭 크로닌 허드슨연구소 아시아태평양 안보석좌] “An end-of-war declaration would be meaningless without a serious commitment to denuclearization on the part of North Korea.”
한국 외교부는 종전선언에 대한 미-한 간 시각차를 강조하는 진단이 쏟아지자 하루 만에 브리핑을 열고 대응에 나섰습니다. “종전선언은 한미 간 각급에서…속도감 있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협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설명을 내놓았습니다.
외교부 부대변인도 정례브리핑에서 “해당 발언을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며 “시각차에 관한 부분은 외교적 협의를 통해 풀어나갈 수 있는 사안이며, 구체적 사안에 대한 한미 간 협의는 현재 진지하고 심도 있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명했습니다.
‘이견을 좁히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한국 정부의 설명과 달리 종전선언에 대한 양국 간 차이는 이미 너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입니다.
미국 정부는 종전선언을 ‘구속력 없는 정치적 선언’이나 ‘비핵화의 입구’로 보는 대신 비핵화 조치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져야 할 법적·정치적 구속력이 상당한 합의로 간주한다는 설명입니다.
게리 세이모어 전 백악관 대량살상무기 조정관은 “바이든 행정부는 종전선언이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을 제한하는 북한의 행동을 포함한 더 큰 조치의 일부라면 이를 지지할 준비가 돼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게리 세이모어 전 백악관 대량살상무기 조정관] “I think the Biden administration is prepared to support an end of war declaration if it is part of a bigger package of steps, including North Korean actions to limit its nuclear and missile programs.”
‘북한의 약속 불이행’을 한반도 문제의 근원으로 판단하고 있는 미국이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구축한 현재의 균형을 깰 어떤 시도도 꺼릴 것이라는 관측도 종전선언에 대한 회의론을 뒷받침합니다.
켄트 칼더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동아시아연구소장은 “미국은 단순히 북한 정권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거의 모든 분야에서 현 상태에 변화를 주는 것을 경계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켄트 칼더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 동아시아연구소장] “I think the US is wary about making changes to the status quo in almost any area, because it simply does not trust the North Korean regime.
그러면서 “이 경우, ‘변화’는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군과 한국군의 지휘구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미국은 북한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변화도 안정을 흔들어 미군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켄트 칼더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 동아시아연구소장] “In this case, changes could also affect the command structure of US and Korean forces on the peninsula, and the US is concerned that any changes would be destabilizing, thus placing US lives at risk without clear reward, as it does not trust the DPRK.”
종전선언에 대한 미-한 간 이견이 노출된 시점에 북한이 미-한 연합훈련 중단과 광물 수출 허용 등을 한반도 종전선언의 선결 조건으로 제시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워싱턴 조야의 반응은 더욱 싸늘해졌습니다.
한국 국회 정보위원회 야당 간사인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28일 국정원에 대한 비공개 국정감사를 마친 뒤 “종전선언 논의를 하려면 만나야 하는데, 만남을 위한 선결 조건을 북한이 제시했다”며 “선결 조건에서 제재 해제를 요구했는데, 내용은 한미연합훈련 중단, 광물 수출 및 석유 수입 허용 등”이라고 전했습니다.
에반스 리비어 전 국무부 수석부차관보는 이에 대해 “북한은 한국이 제공하고 싶어 하는 선물을 고려해보는 조건으로 중대한 양보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뻔뻔스러운 행보”라고 비판했습니다.
[에반스 리비어 전 국무부 수석부차관보] “This is a brazen move in which Pyongyang is demanding major concessions in order to consider the gift that the ROK wishes to present it with. I think this NK move essentially destroys the Blue House’s argument that a unilateral end-of-war declaration would reduce tensions and lead to denuclearization.”
특히 “북한의 이런 행보는 일방적인 종전선언이 긴장을 완화해 비핵화를 끌어낼 것이라는 청와대의 주장을 본질적으로 무너뜨린다”고 지적했습니다.
리비어 전 수석부차관보는 “실제로 북한은 심지어 종전선언에 대한 초기 대화에도 미-한 준비태세를 약화할 (한국의) 양보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며 “성 김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와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종전선언 제안에서 거리를 두는 것은 당연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에반스 리비어 전 국무부 수석부차관보] “In fact, North Korea is telling us that even initial talks about the idea will require major concessions, one of which will undermine US-ROK readiness. No wonder Sung Kim and Jake Sullivan were keeping their distance from the end-of-war declaration idea.”
스콧 스나이더 미국 외교협회 미한정책국장은 “북한이 외교 재개를 통해 말과 행동으로 평화와 비핵화 경로를 명확하고 공개적으로 수용해야 바이든 행정부가 종전선언과 같은 접근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스콧 스나이더 미국 외교협회 미한정책국장] “My reading is that North Korea would have to clearly and publicly embrace a peace-and-denuclearization pathway by words and actions through the resumption of diplomacy before it would be possible for the Biden administration to embrace such an approach.
“따라서 지금 한국이 기울이는 외교적 노력의 일차적 추진력은 북한을 움직여 종전선언을 진전시키는 데 필요한 조건과 동일선상에 놓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스콧 스나이더 미국 외교협회 미한정책국장] “Therefore, the primary thrust of South Korean diplomatic efforts at this time should be focused on bringing North Korea into alignment with conditions necessary to advance an end of war declaration.”
한편 주요 20개국, G20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이탈리아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29일 오후 로마 산타냐시오 성당에서 열린 ‘철조망, 평화가 되다’ 전시회를 관람하던 중 지난달 유엔에서 제안한 “종전선언의 호소”를 또다시 언급했습니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6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종전선언이야말로 한반도에서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며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가 모여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종료됐음을 함께 선언하길 제안한다”고 밝혔습니다.
문 대통령은 2018년과 2020년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도 이미 종전선언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VOA 뉴스 백성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