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종전선언은 한국전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은 국군포로와 전시 납북자 문제의 해결을 전제조건으로 해야 한다고 피해 당사자와 가족들이밝혔습니다. 전쟁 범죄와 피해자를 모두 덮은 채 추진하는 종전선언은 오히려 장기적으로 평화를 파괴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김영권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지난 2000년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입국한 탈북 국군포로 유영복 씨는 14일 VOA에, 지난 연말을 매우 착잡한 마음으로 보냈다고 말했습니다.
문재인 한국 대통령이 지난해 9월 말 유엔총회 연설에서 한국전쟁 종전선언을 적극 재추진하겠다고 밝힌 뒤 한국 정부가 미국 등 국제사회를 상대로 적극적인 지지를 모색하는 모습을 보면서 ‘전쟁에 희생된 피해자들은 왜 안중에 없는가?’라는 의문과 분노, 낙심, 실망감이 교차했다는 겁니다.
[녹취: 유영복 씨] “국군포로 문제는 현재 문재인 정권에서는 생각도 안 하고 있어요. 그런 논의조차도 없고 아예 그 문제는 입 밖에 내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많은 국군포로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 하나도 데려오지 못한다면 이것은 국가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근데 이런 얘기를 해도 (정부가) 아무 반응이 없고.”
올해 92살의 고령인 유 씨는 문 정부 출범 이후 한국에서는 국군포로들이 마치 반공포로처럼 북한에 자원해서 남았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며, 북한은 철저한 성분사회인데 최악의 적대계층으로 낙인찍혀 스스로 아오지 탄광행을 자원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반문했습니다.
[녹취: 유영복 씨] “종전선언 하려면 또 북한도 의향이 있다면 이제 억류됐던 국군포로를 다 부려먹을 대로 다 부려먹었는데 이제는 송환시키고 핵무기라든가 이런 것도 폐기하는 입장을 보이면서 종전선언을 하면 몰라도 우리만이 안타깝게 자꾸 종전선언을 떠들어서 성사되겠는가?”
유 씨는 유엔총회가 지난달 17년 연속 채택한 북한인권결의안에서 처음으로 국군포로 송환과 인권 침해 문제를 제기해 줘 감사하다며 큰 위안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는 지난 2014년 최종보고서에서 한국전쟁 중 최소 5만 명의 국군포로가 한국으로 송환되지 않은 채 광산 등 열악한 곳에서 심각한 인권 침해에 시달렸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유엔군사령부는 앞서 1953년 정전협정 당시 한국군(국군) 실종자 수를 8만 2천여 명으로 추산했었습니다.
특히 당시 포로 교환에 따라 한국으로 최종 송환된 국군포로는 8천 343명에 그쳤던 반면 유엔군이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으로 송환한 공산군 포로는 7만 6천여 명에 달해 큰 대조를 이뤘습니다.
한국전쟁 중 북한에 납치된 10만여 명의 민간인 납북자와 가족도 종전선언 추진에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전시 납북 피해 가족들은 문재인 정부가 국제법적으로 집단 강제실종에 해당하는 북한 정권의 반인도적 범죄를 그냥 덮고 수십 년간 고통당한 가족들에게 양해조차 구하지 않은 채 종전선언을 일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미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은 14일 VOA에, 이런 종전선언의 심각성에 대해 정부를 상대로 공개 질의를 했지만, 한국 통일부는 지난달 답변에서 우려를 반영하기보다 종전선언의 취지와 계획 등 홍보성 설명만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녹취: 이미일 이사장] “저희는 문재인 정권 시작부터 북한과 회담하고 그러면 전쟁 납북자 보고서를 위원회에서 발간한 게 있으니 북한에 전달이라도 좀 하고 전쟁 납북자를 좀 언급하고 의제가 되도록 좀 노력이라도 해달라. 그런데 그런 거 전혀 안 했습니다. 북한 정권이 전쟁 납북자 없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전쟁 납북자 없다는데 어떻게 하냐는 식으로 그쪽을 오히려 지지하는 입장이에요.”
한국 통일부는 지난 2016년까지 전시 납북자 지적은 ‘조작모략극’으로 납북자가 없다는 북한 당국의 주장에 대해 “북한 정권이 사회 각계 지도층 인사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에 대해 조직적인 연행과 납치를 자행한 것은 수많은 증언과 기록이 남아 있는, 부정하기 어려운 엄연한 사실”이라고 반박했었습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이런 직접적인 반박을 삼간 채 “납북자 문제 해결의 실질적 진전이 이뤄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가겠다”는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의 이런 태도에 대해 미국과 유엔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과 한국 등 전 세계 70개 이상의 민간단체와 개인 활동가들이 연대한 북한자유연합(NKFC)의 수전 숄티 의장은 VOA에, 종전선언의 첫걸음은 한국전쟁으로 오랜 세월 고통을 겪은 수많은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 해결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숄티 의장] “We shouldn't even talk about it until the North Korean regime ends the Korean War by releasing the POWs it's holding and accounting for the abductees that disappeared, that they abducted during the war. That's the first step. The war is going on because of North Korea, not because of South Korea, all the provocations have been by North Korea.”
국군포로를 석방해 송환하고 납북 피해자에 대한 생사 확인 규명, 북한 정권이 대남 도발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전제된 뒤 종전선언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로버타 코헨 전 국무부 인권 담당 부차관보도 13일 VOA와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가 ‘인권을 평화의 걸림돌’로 보는 등 북한 정권이말하고 선전하는 것을 본질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지적했습니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앞서 최종보고서에서, 북한 정권이 한국전쟁 당시 한국에서 수많은 사람을 강제로 북한으로 끌고 갔다며,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약 8만에서 10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밝혔습니다.
이와 관련해 유엔 강제실종 실무그룹 의장과 주요 인권 분야 특별보고관 등 8명은 지난 2020년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발표한 특별성명에서 정전협정이 전쟁포로와 강제 이주된 주민들의 송환을 명시하고 있지만 북한 정부는 송환을 지속해서 거부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유엔 인권 전문가들 성명] “Despite the return of prisoners of war and displaced civilians being enshrined in the Armistice Agreement, the DPRK has consistently refused to repatriate them,”
유엔 전문가들은 그러면서 가족들의 고령화로 더는 지체할 수 없는 만큼 북한에 납치된 모든 사람의 신상 정보를 제공하고, 가족과 자유로운 소통을 허용하며, 최대한 빨리 송환할 것을 북한 당국에 촉구했습니다.
이미일 이사장은 “종전선언에 딴지를 걸려는 게 아니”라며, “진실과 피해를 모두 숨긴 채 추진하는 종전선언은 오히려 평화의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이미일 이사장] “북한이 잘못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묻고 인권 문제, 인도적 문제! 아직 생사도 모르잖아요. 그 생사를 모르는 것뿐 아니라 존재 자체를 없앴잖아요. 그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요. 우리가 죽은 사람 살려내자는 게 아니라 진실에 입각해서 해결해야 한다! 북한 정권이 책임질 것은 책임지고 그 다음에 종전선언을 하든가 해야 종전선언도 의미가 있지 말로만 종전선언한다고 그것이 평화인가? 절대 아니란 겁니다.”
국제법 전문가인 신희석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 법률분석관은 14일 VOA에, “전쟁을 끝내는 평화조약은 전쟁포로와 민간인 억류자 문제가 해결돼야 성립이 된다”며 “그렇지 않으면 평화가 지속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신희석 법률분석관] “(종전선언의) 전제조건이라면 당연히 국군포로와 민간인 납북자들의 송환이 선결 조건으로 들어가야 할 겁니다. 그것은 제네바 협약이나 정전협정에서 나왔던 내용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행돼야 할 사안입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세계인권선언이라든가 북한이 가입한 주요 인권조약에 대해 재확인하는, 이것을 준수하겠다는 것을 서면으로 재확인하는 내용이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탈북 국군포로 유영복 씨는 국군포로 송환은 단지 과거가 아니라 현재 군에 복무하는 젊은 병사들에게도 시사하는 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유영복 씨] “미국은 지구 끝까지라도 가서 미군 유해를 찾아오려고 하는데, 한국은 살아있는 국군포로도 데려올 생각을 못 하고 있으니까 만약 유사시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국군 병사들이 용감하게 적진을 향해 ‘돌격 앞으로!’ 하면 돌격하겠는가? 왜 그런가? 아니 우리가 돌격했다가 포로가 돼도 국가가 책임져주지 않는데 왜 죽을 곳으로 가겠는가? 그런 뒤처리를 못하는 지휘관들이 있다면 병사들의 사기가 약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좀 듭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