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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생존 한국군 포로들 사흘만이라도 고향 땅 밟게 해달라”


9일 워싱턴의 민간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HRNK)가 북한에 억류된 한국군 포로들을 주제로 개최한 행사에서 한국군 포로 출신으로 지난 2006년 탈북한 이선우 씨(가운데)가 발언하고 있다.
9일 워싱턴의 민간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HRNK)가 북한에 억류된 한국군 포로들을 주제로 개최한 행사에서 한국군 포로 출신으로 지난 2006년 탈북한 이선우 씨(가운데)가 발언하고 있다.

한국군 포로 출신으로 지난 2006년 탈북한 이선우 씨가 워싱턴을 방문해 북한에 있는 생존 한국군 포로들이 단 사흘만이라도 고향 땅을 밟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아직도 북한에 남아 있는 한국군 포로들의 송환을 위해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와 협력해 줄 것도 호소했습니다. 김영교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올해 93살인 이선우 씨가 북한에 살아있는 고령의 한국군 포로들에 대한 미국 사회의 관심을 호소하기 위해 워싱턴을 찾았습니다.

[녹취: 이선우 씨] “분단이 70년 넘었습니다. 아직도 북한에 국군 포로가 있습니다. 이제는 내 나이가 돼서 90살이 다 넘었습니다. 하지만 국군 포로를 데려올 생각을 안 합니다.”

이 씨는 9일 워싱턴의 민간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HRNK)가 북한에 억류된 한국군 포로들을 주제로 개최한 행사에서 한국 사회가 한국군 포로 송환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에 대한 섭섭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군 포로가 단 사흘만이라도 고향 땅을 밟게 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녹취: 이선우 씨] “남한에는 이제 나이도 많은데 다 늙은거 데려와서 뭐하겠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국군 포로들이 나이가 많아도... 심지어 3일만 살다가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고향에 돌아가서 3일만 살다 죽어도 원이 없겠다고 생각합니다. 내 나라 내 땅 밟아 보는 것, 선조들의 산소도 돌아보고 그러고 나서 그날 죽어서 그 땅에 묻혔으면 좋겠다고…”

이 씨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 15일 한국군에 입대한 후 미군 부대 중 한국전에 가장 먼저 투입된 미 제24보병사단에 배치됐습니다.

미군들과 함께 북진해 신의주까지 올라갔던 이 씨는 후퇴 명령이 떨어지면서 강원도 춘천까지 내려왔습니다.

이후 한국군에 다시 편입돼 강원도의 육군 수도사단에 배치됐습니다.

그리고 1953년 7월, 강원도에서는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내려온 중국군과 38선 방어를 놓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중국군의 압도적인 규모에 열세에 놓이게 된 수도사단은 결국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꽝’ 소리와 함께 의식을 잃었던 이 씨는 나중에 눈을 떠 보니 온 몸에 수류탄 파편을 맞은 상태였습니다.

[녹취: 이선우 씨] “우측 팔에 관통이 되어 있고, 우측 발목은 골절이 됐습니다. 손이 다 이렇게 되고…”

왼손은 손가락 세 개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 씨는 북한의 포로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불과 13일 남겨놓고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어 50년 가까이 함경북도의 탄광에서 탄을 캐기만 한 이 씨.

그러다가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돼 2000년 6월 김대중 한국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면서 한 줄기 빛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한국군 포로 출신으로 지난 2006년 탈북한 이선우 씨(가운데)가 9일 워싱턴의 민간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HRNK)가 북한에 억류된 한국군 포로들을 주제로 개최한 행사에 참석했다.
한국군 포로 출신으로 지난 2006년 탈북한 이선우 씨(가운데)가 9일 워싱턴의 민간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HRNK)가 북한에 억류된 한국군 포로들을 주제로 개최한 행사에 참석했다.

한국군 포로들 사이에도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 소식이 퍼지면서 고국에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녹취: 이선우 씨] “대한민국 대통령이 평양에 와서 김정일하고 회담하는데 이번에는 좋은 일이 있겠다. 포로들이 경사났습니다. 그때 너무 좋아서 아이들처럼 방방 좋아뛰던 분위기는 어디로 가고…”

하지만 한국군 포로 송환에 대한 말 한마디도 없이 남북정상회담은 끝났습니다.

3주 후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은 국방위원장으로부터 선물 받은 풍산개 강아지 두 마리의 이름을 각각 ‘우리’와 ‘두리’라고 지었다는 소식이 북한 매체를 통해서 보도되는 것을 접한 이 씨는 절망했습니다.

[녹취: 이선우 씨] “그래도 한가지 희망을 가지고 기다렸는데 이것은 완전히 아니다. 개 생명보다 못하다. 국군 포로는 개 생명보다 못하다. 이것은 버림 받은 것이다. ”

나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한 이 씨는 결국 스스로 탈북하기로 결심하게 됐습니다.

[녹취: 이선우 씨] “그래서 (포로들이) 죽으면 죽고 하는 심정으로 탈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탈북에 성공했습니다. 56년 만에… 죽으면 죽고, 다른 방법이 없다는 심정으로. 용하게 탈북해서 성공했습니다.”

이 씨는 77세때인 2006년 중국을 통해 한국에 돌아옵니다. 하지만 한국에 와 보니 한국 정부와 한국 사회는 북한에 남겨져 있는 한국군 포로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직도 북한에 국군 포로들이 남아 있다며, 그들의 송환을 위해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와 협력해 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9일 워싱턴의 민간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HRNK)가 북한에 억류된 한국군 포로들을 주제로 개최한 행사에 참석한 전문가들.
9일 워싱턴의 민간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HRNK)가 북한에 억류된 한국군 포로들을 주제로 개최한 행사에 참석한 전문가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데이비드 맥스웰 민주주의수호재단 선임연구원은 한 군인이 조국을 위해 싸우고나서 수십년 동안 포로로 지내는 고통을 견디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씨가 나라를 위해, 그리고 자유를 위해 싸운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면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모두가 이 씨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맥스웰 선임연구원] "Those remarks are really gut-wrenching. For a soldier to fight for his country and then survive what you went through for decades and it's just something none of us can. And what you've done for your country, for freedom, I think that's something we should all keep in mind. I wish we could make it up to you. I wish we could do something to make things better, because we, as free people in the world, owe you so much."

지난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최종보고서에서 한국전쟁 정전 당시 8만 2천 명의 한국군 포로가 실종됐으며, 이 가운데 5만~7만 명 정도가 포로로 억류된 채 한국에 복귀하지 못한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보고서는 특히 북한 정권이 정전협정 체결 뒤 국군포로들로 구성된 비자발적 건설여단을 만들어 강제로 북한 최북단의 탄광과 공장, 농촌으로 보내 강제 노역을 시켰고, 이후 외진 광산으로 보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게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 국방부는 한국군 포로들 가운데 지난 1994년 조창호 중위를 시작으로 2010년까지 모두 80명이 자력으로 탈북해 한국에 귀환했다고 국방백서에서 밝혔습니다.

VOA뉴스 김영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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