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마지막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한국이 북방외교를 통해 국제무대에서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1990년대 북한의 고난의 행군이 고르바초프가 추진했던 개혁 개방 정책의 여파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박승혁 기자가 보도합니다.
91세를 일기로 지난 30일 타계한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한반도와도 깊은 인연을 맺으며 남북한 모두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북한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0년 9월 한국과 수교한 것이 가장 큰 유산 중 하나로 꼽힙니다.
1985년 집권 이후 개혁과 개방을 의미하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하며 진영을 넘어선 외교를 추구한 고르바초프는 ‘북방외교’를 통해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에 나선 노태우 당시 한국 대통령과 한-소 수교에 전격 합의했습니다.
로버트 매닝 애틀랜틱카운슬 선임연구원은 기존의 소련 지도자였다면 한국과 수교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개방을 앞세운 고르바초프였기에 가능했던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로버트 매닝 애틀랜틱카운슬 선임연구원] “Would that have happened with an old style Soviet leader? I think that's something you can attribute actually to Gorbachev – his opening to South Korea. And that was the beginning of efforts to balance their policies with both Koreas.”
당시 소련이 한국을 향해 문을 연 것은 오로지 고르바초프 덕분이었고, 이는 향후 소련과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가 한국-북한 간에 균형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시발점이 됐다는 것입니다.
수교 직후 고르바초프는 사상 처음으로 한국 대통령을 모스크바 크렘린궁으로 초청했고, 1991년 4월엔 소련 지도자로서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제주도에서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이후 한국은 동구권과 구 공산권 국가들과의 교류를 점점 넓혀갔고, 30년이 지난 최근에는 동구권 폴란드에 무기를 수출하는 등 국제무대에서 위상이 당시보다 훨씬 높아졌습니다.
반대로 한국과 수교하기로 한 고르바초프의 결정은 북한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북한 경제를 연구해온 브래들리 뱁슨 전 세계은행 고문은 한·소 수교 2년 후 중국마저 한국과 수교하면서 북한은 체제가 흔들릴 정도의 혼란에 빠졌다고 지적했습니다.
[녹취: 브래들리 뱁슨 전 세계은행 고문] “The recognition of South Korea politically by China and Soviet Union, that obviously was taken by the North Koreans at the time as a backing away from the kind of support system that they had been counting on and complicating their calculation of their future relationship with South Korea, and the US presumably at the same time.”
소련과 중국이 잇따라 정치적으로 한국을 인정한 것은 북한에게 그동안 기대온 지원체계로부터 멀어진다는 사실을 의미했다는 것입니다.
뱁슨 전 고문은 일련의 수교는 또한 북한의 대남 관계는 물론 대미 관계 계산법도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고르바초프 시절 개혁 개방 정책의 예기치 못한 여파로 소련이 무너졌고, 이는 1990년대 북한의 ‘고난의 행군’으로 이어졌다는 겁니다.
[녹취: 브래들리 뱁슨 전 세계은행 고문] “Gorbachev's involvement in it was I think the major trigger. The trade shock that came from that collapse in 1992, primarily, is what triggered the famine.”
뱁슨 전 고문은 고르바초프의 관여가 소련의 붕괴를 촉발하는 계기가 됐고, 이로 인한 1992년의 무역 쇼크로 북한의 기아가 발생했다고 말했습니다.
러시아 전문가인 루시언 김 윌슨센터 객원연구원은 실제로 1990년대 북한 기근의 주요 원인은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가 경제난으로 인해 더 이상 북한을 지원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루시언 김 윌슨센터 객원연구원] “Some of the famines that we saw in North Korea were a result of the Soviets, or the Russians being unable to supply the same amount of energy of oil supplies as they could earlier. Oil was needed to power its North Korea's irrigation system.”
북한이 농업에 필요한 관개 시스템을 가동하려면 석유가 필요했지만 러시아가 예전만큼 지원해줄 수 없게 되면서 나타난 결과가 1990년대의 기근이란 설명입니다.
뱁슨 전 세계은행 고문은 당시 북한은 러시아의 자리를 대신한 중국으로부터도 별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브래들리 뱁슨 전 세계은행 고문] “The Chinese didn't do very much in the early days to fill in the gap of what the North Koreans had lost on the Russians. In fact, my understanding was that the oil that the China was providing to North Korea in that period, they actually increased the price of it when the Soviet system collapsed.”
중국은 소련 붕괴로 북한이 잃게 된 지원 물자 부족분을 채워주는 데 그다지 도움을 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소련 붕괴 후 북한에 공급하던 원유 가격을 올렸다는 것입니다.
뱁슨 전 고문은 북한은 개방을 외치던 고르바초프의 소련이 무너지고 1990년대 경제난을 겪으면서 더욱 폐쇄적이고 외부에 대한 개방을 더 두려워하는 국가가 된 것 같다고 진단했습니다.
[녹취: 브래들리 뱁슨 전 세계은행 고문] “I think the Russian experience sort of helped accelerate Vietnam's decision to really engage the rest of the world and become less dependent on Russia and China. But I think it really underlines this isolationist tendency in North Korea.”
뱁슨 전 고문은 비슷한 상황이었던 베트남의 경우 소련 붕괴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와의 교류를 가속화하고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였다며, 하지만 북한이 취한 선택은 고립주의 성향을 더 분명히 보여준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이 유독 개방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결국 현 정권이 통제력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매닝 연구원은 분석했습니다.
[녹취: 로버트 매닝 애틀랜틱카운슬 선임연구원] “They have a very kind of porcupine psychology. They want to keep things under control and are afraid of any opening up or anything that would infiltrate their system that might undermine their power.”
매닝 연구원은 북한 정권을 뾰족한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에 비유하면서, 모든 걸 통제하려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경제 개방이나 권력을 흔들 수 있는 외부 요인을 모두 두려워한다고 지적했습니다.
VOA 뉴스 박승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