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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캐리 미 해병대 예비역 중장] “중국, 장진호 전투 왜곡…대북 정보유입 ‘유익한 일’”


한국전쟁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인 리처드 캐리 미 해병대 예비역 중장이 VOA와 인터뷰했다.
한국전쟁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인 리처드 캐리 미 해병대 예비역 중장이 VOA와 인터뷰했다.

중국이 애국주의 영화들을 통해 한국전쟁의 장진호 전투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인 리처드 캐리 미 해병대 예비역 중장이 말했습니다. 올해 94세인 캐리 예비역 중장은 VOA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며 미 해병대는8배나 많은 중공군을 압도했다고 말했습니다. 캐리 예비역 중장은 북한 주민들이 외부소식을 필요로 한다며 대북 정보유입은 유익한 일이라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최근 워싱턴에서 열린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 모임(Chosin Few)에 참석한 캐리 예비역 중장을 김영권 기자가 인터뷰했습니다.

기자) 지난 7일부터 11일까지 워싱턴의 펜타곤(국방부 청사) 근처에서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여파로 3년 만에 다시 모였는데, 참전용사 150여 명과 가족 등 400여 명이 참석했다고 들었습니다.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들이 이렇게 끈끈하게 모임을 이어가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캐리 전 중장) 우리 해병대의 훈련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힘들 겁니다. 해병대에 입대하는 사람들은 해병대원이 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매우 힘들죠. 그러나 일단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매우 헌신적이 됩니다. 해병대의 신조를 사랑하고 결과적으로 전투를 더 잘하게 됩니다. 우리가 오래전 강추위 속에 있었든 지금 무엇을 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평생 명예로운 전우애로 뭉쳐있습니다.

기자) 한국전쟁 때 해병대 초급 장교로 참전하셨죠?

캐리 전 중장) 저는 해병대에서 38년 가까이 복무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병으로 입대해 2년간 복무했습니다. 이후 장교 후보학교에 들어가 소위로 임관해 보병소대장으로 유럽에 갔었죠.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으로 돌아와 해병대 1사단에 합류했습니다. 이어 남한을 침략한 공산군을 몰아내려는 한국인들을 돕기 위해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기자) 한국전쟁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 현장에 모두 계셨습니다. 아직도 당시 기억이 생생하신가요?

케리 전 중장) 물론입니다. 우리 해병 1사단은 미 8군의 부름으로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습니다. 이후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넘어가다 맥아더 장군의 명령으로 다시 남하한 뒤 원산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한국군을 도와 북쪽으로 진격했습니다. 우리 해병대 1사단은 거의 중국 국경까지 갔다가 중공군 8개 사단과 싸워야 했습니다. 우리는 불과 1개 사단이었죠. 당시 중공군은 우리가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흥남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흥남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철수한 뒤 다시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서였죠.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저지선을 뚫고 흥남으로 이동하는 미 해병대원들.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저지선을 뚫고 흥남으로 이동하는 미 해병대원들.

기자) 1만 5천 명에 불과한 미 해병이 영하 30도 안팎의 혹한 속에서 거의 10배에 달하는 12만 명의 중공군과 사투를 벌이며 철수한 스토리는 미 전투 역사에서도 매우 유명합니다. 장진호 전투의 유산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캐리 전 중장) 우리가 중공군을 격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겁니다. 우리 사단은 중공군 8개 사단으로부터 공격받았습니다. 근대 최악의 전투인 이오지마 전투와 비교하면 당시 2차 세계대전 때 우리는 일본군에 비해 수적으로 3대 1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진호 전투에서는 중공군에 8대 1로 압도당했습니다. 따라서 장진호 전투는 전혀 다른 종류의 전투였습니다. 규모가 압도적으로 많은 중공군이 우리를 공격한 것이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들을 압도했습니다.

기자) 당시 아군 사상자는 2천 600여 명이었지만 중공군 사상자는 4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미국과 유엔군은 추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 정부가 애국주의용으로 적극 장려해서 제작한 영화죠. 지난해 개봉한 영화 ‘장진호’와 올해 개봉한 속편 ‘장진호 수문교’ 모두 중국이 승리한 전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캐리 전 중장) 저도 그 영화에 관해 들었습니다. 중국은 모든 것을 바꾸고 왜곡해 전했습니다. 그것은 프로파간다(선전) 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주 심하게 패배했고 사기가 저하됐으며 부상을 많이 당해서 군단에 해당하는 병력을 전투에서 빼내야 했습니다. 전투가 끝난 뒤 그들은 중국으로 군단을 철수해 전열을 완전히 재편성하고 장비도 재장착해야 했습니다. 중공군은 전투에서 참패한 겁니다.

기자) 장진호를 비롯한 개마고원에서 흥남으로 철수하시면서 많은 피난민을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캐리 전 중장) 우리는 10만 명을 구출했습니다. 우리가 11월 27일 흥남으로 철수를 시작하자 다양한 지역에서 피난민들이 우리 병력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5연대와 7연대가 해안 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피란민들이 계속 합류했고, 흥남에서 우리는 피난민 10만 명을 대피시켰습니다.

기자) 그런 강추위 속에서 피난민들이 어디서 잠을 자고 어떻게 이동했는지 궁금하네요.

캐리 전 중장) 피난민들은 우리처럼 벌판에서 잤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오른 피란민들.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오른 피란민들.

기자) 이런 전쟁에 대해 젊은 세대들은 잘 모른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전쟁의 산증인으로서 어떤 얘기를 하고 싶으신가요?

캐리 전 중장) 한국인들은 전쟁에서 그들의 힘과 기개, 능력을 보여줬습니다. 그들은 훈련을 받지 않았거나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상태로 전투를 시작했고, 훈련받은 사람들은 지금의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이를 지속해야 했습니다. 이제 한국 군대는 세계 최고의 군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인들이 해야 할 일은 그들 스스로 방어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북한이 중국의 도움 없이는 절대 한국을 다시 공격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이에 대응해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한국인들이 그것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은 군사 장비를 잘 갖추고 있고 훈련도 되어 있습니다. 최고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맨바닥에서 거의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갔습니다. 한국인들은 그들이 해야 하는 것에 대해 감당할 준비 태세가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한국은 말씀하신대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룬 채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여전히 세계 최악의 빈곤 국가이자 최악의 인권 탄압 국가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저희VOA는 이런 북한에 다양한 외부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캐리 전 중장) 그것은 유익한 일입니다. 북한 주민들에게 그런 외부 소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북한 주민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그들 자신이 한국의 일부라고 선언하는 것일 겁니다. (제가 만난) 북한 주민들은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로서 남한과 결속하길 원했었습니다.

기자) 끝으로 덧붙이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요?

기자) 저는 한국이 지금까지 성장한 방식 그대로 계속 성장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해군과 해병대도 계속 강력해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들은 매우 빠르게 발전할 것입니다. 우리 미국이 해왔던 같은 방식으로 말이죠. 우리 미국은 민주주의 편에 매우 강력한 역량을 가진 국가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겁니다. 한국인들은 우리의 매우 유익한 ‘전사 파트너(Warrior partner)’ 입니다.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인 리처드 캐리 미 해병대 예비역 중장을 만나 봤습니다. 인터뷰에 김영권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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