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부터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아 한 길만을 쭉 걸어온, 노래만을 불러온 한 탈북민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리랑 탈북 가수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요. 탈북민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탈북민의 세상 보기’, 오늘은 ‘아리랑 가수’ 백미경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서울에서 동예원 기자입니다.
[녹취: 노래 현장음]
아리랑 가수 백미경 씨가 관객 앞에 서서 류계영의 '인생'을 부릅니다. 북한 청진이 고향인 백미경 씨의 인생이 담긴 이 노래를 들으면서 관객들도 집중하는 모습인데요.
[녹취: 노래 현장음]
감동의 무대를 마치고 내려온 백미경 씨. 자신을 아리랑 가수라고 소개하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녹취: 백미경 씨] “네. 안녕하세요. 저는 아리랑 가수 백미경입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2006년에 대한민국으로 와서 2007년에 '반야월 제1회 가요제'에 입상했고요. 그때부터 활동했습니다. 아리랑 가수라는 이름은, 남북한이 통틀어 우리 아리랑이라는 뜻이 있어서 제가 통일 가수, 무슨 가수, 무슨 가수 정말 많잖아요. 근데 저는 아리랑 가수로 활동을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자주 불렀던 아리랑을 한국에서도 접하게 되면서 백미경 씨는 남북을 잇는 아리랑과 같은 가수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녹취: 백미경 씨] “북한에서는 아리랑이 거의 국가처럼 많이 불려요. 제가 북한에서 6살 때부터 활동하면서 정말 많이 불렸던 아리랑인데 한국에 오니까 그 아리랑이 그대로 불리더라고요. 근데 색깔만 조금 달라요. 이게 북한 아리랑은 클래식으로 불리는데 한국 오니까 판소리처럼 불리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점이 그것만 있지, 가사도 모든 거의 비슷하고 아리랑 선율은 또 똑같고요. 그래서 이게 우리 아리랑이, 남북한이 아리랑으로 먼저 통일하고 있었구나 싶더라고요."
백미경 씨는 북한에서도 인정받는 가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는데요. 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끼와 실력을 늘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자신과 가장 가까운 어머니가 스승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녹취: 백미경 씨] “한 길로 쭉 왔어요. 근데 우리 엄마가 북한이 전쟁 끝나고 제일 먼저 처음 생긴 가극단이 '피바다가극단'이었어요. '피바다가극단'에 우리 엄마가 1기생이세요. 그래서 엄마한테 노래를 배우다 보니까 저는 스승이 없어요. 엄마가 스승이세요. 그래서 엄마한테서 배우다 보니까 몇 살 때부터 가르쳐줬는지는 모르겠지만 6살 때쯤에, 무대에 서고 또 큰 무대에 가고 이렇게 쭉 한 길로 왔어요."
하지만 고난의 행군 시기, 백미경 씨는 공연 활동과 더불어 돈을 벌기 위해 달러 장사와 금 장사를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불법이었기 때문에 보위부의 내사를 받게 되고요. 감시받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백미경 씨는 탈북해 중국으로 갔죠. 그때가 1997년도입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10년을 살다가 안정적으로 사회에 정착하고 싶은 마음에 2006년 한국으로 온 거죠. 그럼, 백미경 씨의 한국 첫 무대는 언제일까요?
[녹취: 백미경 씨] “그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가 제가 2007년도에 10월에 어떻게 보면 첫 무대라고 할 수 있어요. 근데 반야월 선생님 제1회 가요제를 마산 MBC에서 했어요. 그런데 마산이 우리 아버지의 할아버지 고향이다 보니까, 인터넷 들어가서 보니까 마산 MBC에서 가요제를 하더라고요. 어머 나도 노래는 할 줄 아는데... 하고 버스 타고 뭐 타고 택시까지 타고 갔는데 사람이 엄청 많잖아요. 근데 교통비 값은 해야죠. 했는데 거기서 7명이 올라서는 본선에 오라고 전화가 왔을 때 저는 꿈인가 생시인가 했었어요."
그렇게 백미경 씨는 '반야월 가요제'에서 첫 데뷔무대를 치르게 되는데요. 예상치 못했던 난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녹취: 백미경 씨] “첫 무대다 보니까, 트로트 무대에 서니까 드러머하고 뒤에 기타하고 꽁짜 꽁짜 꽁쾅쾅 하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1절하고 2절 사이에 간주 있을 때 돌아서 ‘좀 살살 치라우.’ 무대에서 그래 버린 거예요. 그랬더니 그때 지금 고인이 되신 허참 선생님이 이 동무래 북한에서 온 지 얼마 안 됐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때는 그게 애드리브인지 뭔지도 못 알아듣고 그다음에 2절 가는데 또 어디다 맞춰야 하겠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기타에 맞춰야 하는지 드럼에 쿵쿵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근데 했던 게 있으니까 잘 넘어가긴 해서 3등을 받아서 그 무대가 제일 기억이 많이 나요."
북한과는 다른 악기 구성에 당황했지만, 백미경 씨는 자신의 끼를 마음껏 펼쳤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했는데요. 남북의 다른 공연 문화에 익숙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녹취: 백미경 씨] “너무너무 다른 무대다 보니까 제일 처음에 왔을 때는 이거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저는 공연이 북한에서는 다 실내의 큰 대극장에서만 공연했는데 한국에 오니까 정말 돌잔치까지 다 가고 칠순 잔치는 기본이고요. 큰 건 축제고 더 큰 건 가요무대에 가봤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이 감정 기복도 엄청나요. 근데 제일 처음에는 그게 정말 놀라웠어요. 그리고 북한 무대는 이 하이라이트 조명이 딱 비추면 어디로 봐야 할지도 모르고 그냥 중심만 보고 클래식, 손 모아서 하고 끝나는 거거든요. 근데 한국에 오니까 모든 사람 눈을 다 맞춰줘야 하고 이 호응이 되게 중요하더라고요. 그거 깨우치기까지 좀 시간이 걸렸거든요. 그다음부터는 또 호응이 없으면 할 마음이 안 생겨요. 그래서 또 막 끌어 올리느라고 막 같이 놀아주고..."
이렇게 달라진 무대 분위기에 맞춰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백미경 씨는 발음 교정에도 신경 썼다고 합니다.
[녹취: 백미경 씨] “제일 많이 듣던 소리가 노래에 사투리를 좀 빼라. 근데 그 사투리가 뭔 소리인지 제일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어요. 근데 내가 공연한 거 다시 봐도 못 알아들었어요. 근데 한국 트로트를 정통으로 배우면서 ‘아, 이게 이 발음이 사투리구나.’ 이제는 알고 그거를 많이 캐치했죠. 쉽게 예를 들면 어머니랑 오머니랑 ‘어’ 자 발음을 ‘오’로 하더라고요. 북한이 오머니 근데 지금은 어머니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 발음이더라고요. 니은 발음이 니은 이렇게 들어가는 발음이에요. 터져 나오는 앞 발음이 아니고 이거를 캐치(이해)하는 데 10년이 걸렸습니다. 계속 모르겠더라고요. 그다음에 알고 나서 알아듣고 나서도 한 3~4년이 걸리더라고요. 집에 가면 다 엄마도 있고 아빠도 식구들이 다 북한 사투리니까 내가 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서 지금까지 해왔던 무대 중 가장 뿌듯했던 무대에 대해서는 지난 2008년 4월에 올랐던 KBS '가요무대'를 꼽았습니다.
[녹취: 백미경 씨] “2008년 4월 7일에 가요무대 섰던 게 제일 뿌듯한데요. 가요무대는 중국에서 제가 10년 살면서 가요무대에, 저 꿈의 무대에 내가 저기 관객석에라도 앉아볼 수 있을까의 꿈이었었거든요. 근데 그게 마치 저한테 선물 주듯이 제가 4월 7일이 또 생일인데 4월 7일 날이 그 방송이라 우리 엄마는 TV 제일 큰 거 그때 바꿔놓고 온 동네 어르신들 다 모이라고 잔치한다고 집에서 떡 하고 TV 틀어놓고 난리 났었어요. 너무 꿈의 무대를 섰죠."
온 가족이 모여 백미경 씨의 무대를 지켜봤고요. 백미경 씨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또 뭉클한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녹취: 백미경 씨] “너무 뭉클해서 ‘늴리리 맘보’를 즐겁게 해야 하는데 하고 나서 나와서 내가 이렇게 까불면서 어떻게 했을까? 이 뭉클한 무대인데 그래도 돌아보니까 되게 까불까불하며 잘했더라고요. 저는 1집에서는 ‘사랑은 하나야’라는 곡을 냈었고요. 2집은 ‘마니마니’, ‘많이 많이 사랑해 주세요.’하는 곡이에요."
현재 백미경 씨는 남북문화의 이질감을 줄이기 위한 공연뿐만 아니라 같은 탈북민 유튜버의 유튜브 채널에도 출연해 자기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자신을 찾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겠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아리랑 탈북 가수 백미경 씨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요?
[녹취: 백미경 씨] “빨리 통일의 문이 열려서 고향에 가서 콘서트를 하고 싶은, 통일 콘서트를 하고 싶은 게 최종 소원이죠. 정말 빨리 하고 싶어요. 내가 한국에 와서 또 이런 노래도 이렇게 배웠다고 하면서 멋진 자랑도 하고 싶고 정말 통일의 무대에 서고 싶은 게 소원이죠. 저는 여기서도 한국에서도 정말 아리랑 하면 눈물 나요. 아리랑이 곡절마다 제가 공연은 많이 다니지만, 이 한 절 끝날 때마다 박수 나오는 건 아리랑밖에 없더라고요. 진짜로 아리랑은 한민족의 애환인 것 같아요. 다 담겨 있는 것 같아, 한결같이 이렇게 소원을 담아서 맨날 소원입니다, 소원입니다, 할 때 빨리 오지 않을까요.”
서울에서 VOA 동예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