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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의 세상보기] 다시 꿈의 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전 북한 열차원 탈북민 조경희 씨’


[탈북민의 세상보기] 다시 꿈의 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전 북한 열차원 탈북민 조경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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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열차원으로 일했던 탈북민이 있습니다. 8년 동안 북한 무산승무대 열차원으로 근무한 탈북민 조경희 씨인데요. 최근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열린 사회통합 토크콘서트, 남북더보기 ‘열차 승무원 편’에서 북한에서의 열차원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탈북민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탈북민의 세상 보기’, 오늘은 ‘탈북민 조경희 씨’의 얘기 전해 드립니다. 서울에서 동예원 기자입니다.

[녹취: 현장음]
‘남북더보기’ 행사에 참여한 탈북민 조경희 씨가 북한 열차원으로 일하면서 한 승객이 열차 안에서 출산했던 경험을 떠올립니다. 승객의 출산을 돕고 도착지에서는 바로 병원에 인계될 수 있도록 안내했다고 하는데요.

지난 2008년 딸과 함께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 조경희 씨는 남들 앞에 서서 이야기하는 것이 처음이라고 하면서, 먼저 행사에 참여한 계기를 설명했습니다.

[녹취: 조경희 씨] "열차 승무원 토크 콘서트 한다고 해서 연락이 왔었고 간만에 내가 북한에서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릴 수 있겠구나 하고 기꺼이 참석한다고 약속했죠. 열차 화장실이라든가 그다음에 손님들한테 어떤 역할을 했는지 진상(무례한) 손님, 그런 손님에 대해서도 여쭤봤고 그다음에 통일에 대해서도 여쭤봤고...너무 좋았죠. 옛 추억을 떠올려서 열차원 하는 시절이 너무 좋았거든요. 제가 하고 싶었던 직업이라서 그런지 그 시절만큼은 진짜 남한에 와서도 못 누려봤어요. 그런 행복한 순간을, 오늘 그 시절 떠올려서 좋았어요.”

조경희 씨는 평양에 가보고 싶은 마음에 열차원을 꿈꿨다고 하는데요. 결국 열차를 타고 평양에 가진 못했지만, 아버지의 도움으로 무산 승무대 열차원이 되었습니다.

[녹취: 조경희 씨] "전 원하는 걸 꼭 하는 성격이라서 처음에는 평양 같은 데 가보고 싶어서 했는데 청진 승무대에 들어가면 평양 같은 데 가거든요. 무산, 평양 해서 근데 청진 승무대 들어가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해요. 아버지가, 막내라서 기숙사 생활 절대 못 시킨다고 무산 승무대에 날 넣은 거예요. 아버지 인맥으로, 그래서 무산승무대 무산, 청진밖에 못 한 거죠. 북한은 서류 면접은 따로 없고 인맥으로 어쨌든 아버지가 넣었잖아요. 그냥 승무대 대대장을 만나는 게 면접이에요. 대대장 방에 가서 면접 한 번 보고 OK 하면 그다음 날부터 출근하는 거거든요. 그렇게 면접 봤어요.”

자신이 원하는 승무대에서 근무하진 못했지만, 조경희 씨는 일단 열차에 타는 것을 참 좋아했다고 합니다. 열차에 타고 이동하는 것 그리고 손님들과 대화하는 순간이 즐거웠다고 하고요. 남북한 열차원의 같지만, 다른 점도 얘기했습니다.

[녹취: 조경희 씨] "북한도 똑같아요. 미소, 친절. 항상 열차 타면 손님들한테 웃어야 하고 너무 진상(무례한) 손님들은 같이 싸워도 돼요. 지금 저도 공공기관에서 일하는데 잘릴까 봐 민원인한테 욕먹거나 해도 ‘네네.’ 이러지만 북한은 같이 싸워요.”

그러면서 북한에서는 역을 출발하고 도착할 때마다 열차원이 직접 안내한다고 합니다.

[녹취: 조경희 씨] "웃으면서 안녕하십니까? 이러죠. 여기는 안녕하세요? 하잖아요. 그리고 열차가 떠날 때 올라서 열차 방송도 있긴 하는데, 칸마다 열차원이 한 명씩 다 있거든요. 그래서 앞에 중간쯤에 가서 '안녕하십니까? 이 열차는 무산역을 떠나 청진역까지 가는 154 열차입니다. 우리 열차는 첫 번째 칸은 화물칸, 단속 칸, 군인 칸 그다음에 일반 객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중간에 물어볼 것이 있으면 담당 열차원이나 여객전무를 찾아가시면 됩니다.' 이렇게 인사말 하거든요. 그리고 매 역마다 도착하기 전에 '다음에 도착할 역은 아무 역입니다. 내리실 손님들은 미리 준비해 주십시오.' 여기는 안내방송 하는데 우리는 중간에 가서 다 수동이죠.”

‘남북더보기’에서는 남북한 출신의 열차원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며, 통일 이후 가보고 싶은 목적지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했는데요. 조경희 씨의 소감도 들어봅니다.

[녹취: 조경희 씨] "제가 느낀 게 남한하고 북한이 같은 게 많더라고요. 한민족이라서 그런지... 아, 이래서 한민족이구나 하는 걸 더 새삼스럽게 느꼈고 뛰어나게 통일 운동을 하는 건 없지만, 앞으로 통일되면 북한에 가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겠다, 이런 거는 미리미리 공부하고 있으니까 한 사람 한 사람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 통일도 빨리 올 것 같아요.”

그런데 북한에서 자신이 원하던 직업으로 행복한 삶을 이어가던 조경희 씨가 고향을 떠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녹취: 조경희 씨] "출근할 수 없는 상태가 돼서 일주일 동안 다른 데 가서 잠수탔다가 그다음에 두만강 건너서 탈북하는데 두만강이 키 넘는 데도 있는데 모르고 들어가면 빠져 죽거든요. 수영도 못하고 그래서 미리 길도 알아보고 어느 쪽으로 가면 얕다, 그런 거 미리 알아보고 탈북하는 길이 내가 살 길이구나, 하고 어쩔 수 없이 탈북해서 중국에서 10년 살았죠.”

그렇게 2008년 한국에 입국해 15년째 정착하고 있는 조경희 씨는 처음 한국에 와 무엇부터 해야 할지, 다시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많은 고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대학교 입학과 자격증 시험까지 다양한 배움의 시간을 거쳤고요. 현재는 춘천시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녹취: 조경희 씨] "사이버 대학 공부도 하고 자격증도 이것저것 많이 따고 지금 춘천시청에 들어가서 일하고 있어요. 수도 요금 민원 상담, 8년 정도... 근데 이제 8년 동안 하니까 노하우가 쌓여서 웬만한 민원은 처리 되게 잘하거든요. 그냥 일단 불만을 들어주죠. 일단 들어주고 ‘선생님, 이런 게 이런 게 불만이군요.’ 그리고 해결할 수 있는 건 해결해 주고 해결 못 하는 건 이런 건 안 됩니다. 딱 얘기하고 근데 일단 듣는 거 잘 들어주면 한 수 꺾여요. 민원도, 그렇게 일하는 거죠. 그러면서 칭찬하는 민원인들도 많아요. 친절하다고 저만 찾고 단골 민원인들이 많이 생겼거든, 그때는 일 잘하고 있구나...”

그리고 조경희 씨에게 한국에서 이루고 싶은 또 다른 목표가 있냐고 물어보니까 이제 자신의 목표보다는 딸이 원하는 꿈을 이뤘으면 좋겠다고 말했고요. 이날 현장에서는 엄마를 응원하기 위해 찾아온 딸 조신애 씨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먼저 행사 소감에 대해 들어봅니다.

[녹취: 조신애 씨] "항상 한국에서 엄마를 보면서 우리 엄마지만 진짜 부지런하고 열심히 산다는 생각을 해왔었는데, 공부도 되게 여러 개 하고 자격증도 따고 그렇게 생각했다가 그 모든 것들이 오늘 무대에서 빛을 발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되게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어머니께서 말 못 하는데 긴장되고 근데 지루하지 않게, 재치 있게 말하는 모습 보면서 '와, 우리 엄마 진짜 멋있다. 자랑스럽다.'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지막에 엄마가 오늘 이 자리에서 옛날 그 행복했던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좋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줄 알았으면 평소에 관심을 좀 더 가질 걸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재밌었고 엄마가 자랑스러웠어요.”

그러면서 조신애 씨는 자기소개와 함께 이루고 싶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녹취: 조신애 씨] "저는 99년생 26살이고요. 엄마가 탈북해서 중국으로 갔을 때 저는 중국에서 태어났고 그때 엄마랑 같이 한국에 와서 학교 다니고 대학교도 졸업하고 지금은 완전 사회 초년생,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교 졸업한 지 2년, 2년 전에 대학교 졸업했고요. 연기과를 졸업했는데 배우를 꿈꾸고 있어서 지금은 극단에서 배우 겸 조연출 겸 공부하면서 가끔 공연도 올리면서 보험회사에서 돈을 벌고 일하고 있어요.”

또한 열심히 살아가는 엄마를 바라보며 조신애 씨 또한 위로와 힘을 많이 얻는다고 말했고요. 끝으로는 수줍지만, 엄마를 향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녹취: 조신애 씨] "엄마가 해내니까 나도 열심히 해야겠다. 열심히 해내야겠다. 조언이라기보다는 저는 엄마랑 되게 친구처럼 지내서 그냥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엄마, 나 오늘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런 것 같아. 엄마, 어떻게 생각해?’ 엄마는 ‘이런 거 아닐까?’ 그래서 아, 그런가? 뭐 이러면서 서로 대화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일단 너무 멋있고 그냥 엄마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뭐든 이렇게 다 했으면 좋겠고 평소에 이런 말 안 하는데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엄마 사랑해.”

마지막으로 조경희 씨는 북한에서 이루지 못했던 단 하나의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바로 평양으로 가는 열차에 탑승하는 건데요. 지금도 그 상상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녹취: 조경희 씨] "평양, 꿈을 못 이뤘잖아요. 평양 아무나 못 가거든요. 거기는, 증명서 떼기가 되게 힘들어요. 열차원인데 갈 기회가 없어 못 갔죠. 내가 남한에서 열차 승무원 하는 상상을 많이 했어요. 지금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50대 지나서도 받아준다면 통일되면 여기 남한 열차원 복을 입고 평양까지 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상상을 매일 해요.”

서울에서 VOA 동예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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