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부터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국제 정치와 남북 관계를 가르치는 한 탈북민 교수가 있습니다. 지난 2004년 9월, 한국에 정착한 김성렬 씨인데요. 탈북민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탈북민의 세상 보기’, 오늘은 ‘부산외대 김성렬 교수’의 첫 번째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서울에서 동예원 기자입니다.
[녹취: 김성렬 교수] “가장 큰 원인은 북송 다시 또 탈북 그리고 늘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보니까 저의 10대는 사춘기를 겪을 겨를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까 이젠 뭔가 배워야겠다…”
부산외국어대학교의 김성렬 교수가 탈북 이후 학업에 뜻을 품게 된 계기를 설명합니다. 1985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난 김 교수는 두 번의 탈북 시도 끝에 2004년 한국에 정착했는데요. 북한의 경제난을 이기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성렬 교수] “탈북한 이유가 생계형 탈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경제난이 심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사했고 저희도 그 혹독한 경제난을 피해 갈 수 없었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생존을 위해서 탈북할 수밖에 없었고 중국이라는 곳에 가면 어느 정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얘기를 듣고 결심하게 됐죠. 일단 제가 먼저 한국에 왔어요. 그러니까 중국 북경 지역의 브로커를 만나서 그분이 북경 지역에 가서 다른 탈북민을 모아서 몽골 루트로 해서 한국에 오는 것을 계획했죠. 그래서 일단 브로커를 만나서 어머님하고 같이 갈 거냐고 물어봤을 때 저희가 드릴 돈이 없었어요. 일단 내가 먼저 한국에 온 다음에 정착 지원금을 받아서 어머니를 데려오자고 하는 생각을 갖게 됐죠.”
그렇게 한국에 먼저 입국한 김 교수가 하나원에서 정착 교육을 받고 있을 때 또 다른 연락을 받게 됐는데요. 김 교수의 어머니 또한 무사히 한국에 왔다는 연락이었습니다.
[녹취: 김성렬 교수] “국정원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어머님이 한국에 도착했다. 그래서 ‘어? 그럴 리가 없는데…’ 그래서 통화해 봤더니 브로커가 후불로 정착 지원금을 받으면 그거를 다 한꺼번에 지불하는 방식으로 하시면 된다고 하셔서 어머님이 한국에 오게 된 거죠.”
이후 중국에 남아있던 누나도 김 교수의 노력으로 한국에 정착했고요. 김 교수가 한국에 입국했을 때의 나이는 19살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중국에서부터 한국에 오면 공부하겠노라고 다짐했다고 하는데요.
[녹취: 김성렬 교수] “북한에서는 사실 대학교 갈 수 있는 기회조차도 없잖아요. 저희 같은 경우는 아예 적대 계층에 포함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토대가 나쁘면, 대학교 가서 공부할 수도 없었고 그런 기회 자체가 없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는 공부만 잘하면 대학교도 갈 수 있고 대학원 공부도 할 수 있고 다양한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에 오자마자 대학교 준비를 했죠. 그래서 그렇게 하려면 뭘 할까? 라고 했을 때 일단은 책부터 읽어야겠다. 그래서 한국 선교사님이나 미국 선교사님이 중국 올 때마다 가져오는 책들이 있었어요. 그게 철학적인 내용과 역사적인 내용이 다 포함된 책들이었어요. 그런 것들을 읽으면서 철학에 관심을 두게 됐고 역사에도 관심을 두게 됐고 철학이나 정치나 역사나 이런 쪽으로 공부를 해보자, 생각했었죠.”
그래서 김 교수는 대학교 진학을 위한 검정고시부터 준비했습니다. 탈북 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를 다니며 한글부터 다시 배웠고요. 약 1년 만에 초중고교 검정고시를 모두 통과했죠.
[녹취: 김성렬 교수] “‘하늘꿈(학교)’이라고 하는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가 있어요. 저는 북한에서 중학교 1학년 중퇴였기 때문에 초등학교 과정 또 중학교 과정, 고등학교 과정 그다음에 대입 검정고시라고 하는 마지막 시험까지, 4개 정도의 시험을 봤었죠. 근데 어떤 공부를 하겠다고 하는 목표를 가지니까 그다음부터 속도가 붙더라고요. 재미있고 과외를 좀 많이 받았어요. 천안에 고신(신학)대학원이라고 하는 시설이 있는데 거기에 전도사님들이 와서 공부하세요. 그분들 중에는 서울대 출신도 있고 연대, 고대 출신도 있고 카이스트 출신, 다양한 학교 출신의 전도사님들이 계셨는데 각자 영어 잘하시는 분, 수학 잘하시는 분 이런 분들이 계셨어요. 그래서 가서 부탁하고 과외를 받았죠. 계속, 그래서 오전과 오후는 수업 듣고 저녁에는 과외 공부하고 시험을 준비했더니 열심히 했더니 4개 정도를 다 통과했더라고요.”
대입 검정고시까지 모두 통과한 김 교수는 고민 끝에 경상북도 포항시에 있는 한동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졸업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하는데요. 그 이유와 함께 대학원 진학의 과정까지 들어봅니다.
[녹취: 김성렬 교수] “대학교를 7년 다닌 이유는 한동대가 거의 수업 절반이 거의 한 60~70%가 다 영어로 진행됩니다. 그래서 영어 공부를 하겠다고 어학연수를 많이 했고, 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영국 유학을 준비했었어요. 학비가 너무 비싸서 결국 포기하고 국내 대학원에 지원해 보자, 근데 또 학비가 없잖아요. 생활비도 없고 근데 마침 그때 미국의 헤지펀드(hedge fund) 하는 전문가죠. 조지 소로스(George Soros)라고 하는 사람인데 이분이 탈북 대학원생한테 장학금을 지원해 주고 있었어요. 그때 선정됐어요. 그래서 그러면 북한대학원대학교로 갈 것인가? 아니면 연세대를 갈 것인가? 고대를 갈 것인가? 고민하다가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으로 가자, 통일학협동과정이라는 게 있어서, 국제 관계에 관한 수업을 듣고…”
그렇다면 김 교수는 대학원에서 어떤 주제로 석사 과정 논문을 썼을까요?
[녹취: 김성렬 교수] “대학원에서부터는 기본적으로 내 분야를 찾아야 하고 내 포지션(위치)을 찾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고민을 계속하면서 제가 ‘우드로월슨센터(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미국 사회과학기관 연구단체)에 있는 외교 문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그게 냉전 시기에 북한과 공산주의 국가들의 관계가 다 기록된 공식 외교 문서거든요. 그래서 석사학위 논문을 ‘북중 관계’로 쓰고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김 교수는 석사 과정을 하는 도중 또 다른 고마운 기회를 잡게 됐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할 기회가 주어진 건데요.
[녹취: 김성렬 교수] “석사 입학해서 3월부터 공부 시작하잖아요. 근데 2016년 1월이었는데 남영동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서 저를 부르더라고요. 공공외교 담당하는 분이, 올 수 있겠냐? 자기 부장되시는 미국 분이 당신을 지금 만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갔죠. 가서 영어로 대화하고, 북한이라는 지역이 독재가 영원하다는 거는 성립될 수 없고 언젠가는 꼭 무너질 텐데 이제는 인재를 양성해야 할 시기라고 본다. 그래서 미국 가서 공부하고 싶다. 미국 가서 국제 관계를 공부하고 싶고 미국의 시각에서 한반도를 좀 보고 싶다. 탈북 청년들도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에 관해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 이런 식으로 제가 얘기했죠. 그랬더니 찾아보자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함께 노력해 봅시다, 하고 그리고 나서 그 분이 저한테 이메일 보내주신 거예요. 다음 주에 미일 행사가 있는데 여기 좀 와라, 갔는데 그분이 하는 얘기가, 당신이 미국 가서 공부할 수 있게 됐다. 풀브라이트(Fulbright Scholarship) 프로그램 안에 탈북 청년들이 지원할 수 있는 TO(일정한 규정에 의하여 정한 인원)를 만들어 놨다는 거예요.”
풀브라이트 장학금(Fulbright Scholarship) 은 외국인의 미국 대학원 유학을 지원하는 미국 정부(미국 국무부) 장학금입니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기에 김 교수는 석사 논문을 쓰면서 미국의 대학원 입학 자격시험까지 준비했고요. 미국 시러큐스대학교(Syracuse University) 대학원인 맥스웰스쿨(Maxwell school)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했습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박사 논문을 쓰던 도중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죠.
[녹취: 김성렬 교수] “그때 코로나 시기이기 때문에 미국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었어요. 그리고 또 한국에서 논문에 참고할 자료들이 꽤 많았기 때문에 한국에 들어와서 논문을 교정하는 시기를 몇 개월 정도, 지도 교수하고 계속 줌(Zoom)으로 이 단어 여기 왜 있냐? 필요하냐? 안 필요하냐? 몇 개월 동안 피 말리는 시간을 가졌어요. 집에 베란다가 있는데 어느 날에 제가 그 베란다에서 술 마시면서 이렇게 울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엄마가 그거를 뒤에서 이렇게 촬영하고 그 정도로 정말 그냥 여기서 박사 포기하고 취직이나 하자, 그런 생각까지 했었어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거의 다 왔는데 이러면서 계속 수정 작업을 거쳐서 교수님께 보냈더니, 교수님이 또 수정해라. 세 번 정도 말씀해 주셨어요. 다시 날아와서 다시 수정하고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너무 힘들다, 이건 진짜 사람이 미쳐가는 작업이다, 이게 마지막이 되기를 진짜 바란다고 하면서 최종 논문을 교수님께 보냈더니 이 정도면 심사 볼 수 있겠다, 이렇게 된 거예요.”
드디어 2021년 12월, 김 교수는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배움과 도전은 계속됐는데요. 그 자세한 얘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 이어집니다.
서울에서 VOA 동예원입니다.